김중위 곧은소리

"1946년 8월 6일(음력)에 나서/2009년 5월 23일 만 63세의 일기로/ 이승의 생을 마감했다/~마침내 대한민국의 16대 대통령을 지낸/ 비운의 전사/…천명을 어기고 목숨을 끊었다." 장터에서 부터 청와대에 이르기 까지 만나는 사람마다 그에 대한 시(詩) 한 수씩을 지어 온 시인 허홍구가 어느 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쓴 시다. 허 시인은 여기서 노무현을 '비운의 전사'라고 불렀다.

"노무현은 이중성의 인간이다. 빛을 향해서 뛰면서도 꼭 그늘을 남겼고, 좋은 일을 하면서도 꼭 나쁜 얘기를 불렀다. …세상을 뜨겁게 바라보면서도 보는 눈은 한쪽이었다." "역사의식은 뒤틀렸고, 오만은 헌법을 넘었고 지식은 짧았으며 혀는 너무 빨랐다. 권위를 담을 그릇이 없었고 세계와 북한을 너무 몰랐다." 노 전 대통령이 퇴임할 무렵의 어떤 일간지에 게재된 사설이다.

필자 또한 비슷한 시기에 이 난을 통해 노무현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한 적이 있다. "노 전 대통령은 한 가지 큰 업적을 남긴 것이 있다. 그것은 '누구라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함께 그러나 아무나 대통령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이다." 누구라도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민주주의는 피를 흘리며 발전해 온 것이다. 그것을 노무현은 실증해 주었다. 그러나 아무나 대통령이 되어서도 안된다는 사실 또한 노무현은 몸으로 실현해 보였다. 위의 사설에서 "세월이 흐르면서 진짜 노무현이 하나둘씩 드러났고 나라는 혼란스러웠다"라고 쓰고 있으니 말이다.

무엇이 그의 빛이요 무엇이 그늘인가? 첫 번째 사례로 사패산 공약의 폐기를 들 수 있다. 그는 자신의 후보시절 공약도 과감하게 백지화 할 만큼의 용기가 있었다. 그의 장기(長技)요 빛이다. 후보당시 그는 사패산을 관통하는 서울 외곽순환고속도로 건설계획을 전면 백지화 하겠다고 공약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불교 조계종 종정인 법전스님이 있는 해인사로 그를 찾아가 정중하게 사과하면서 말했다. 이미 공사가 거의 완공단계에 있어 더 이상 대선 당시의 공약을 지키지 못하게 되어 미안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 공약은 2002년 12월 선거운동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불교계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공표한 10대 공약중의 하나였다.

두 번째의 사례로 한·미 FTA문제를 보자. 노대통령은 엄밀히 말하면 반미주의자다. 그런 그가 "개방한다고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개방하지 않고는 선진국으로 갈수 없다"고 하면서 한·미 자유 무역협정을 그야말로 화끈하게 밀어 부쳤다. "던질 때에는 화끈하게 던지고 받을 것은 받는 게 났다"고 하면서 말이다.

세 번째 사례로 제주해군기지 계획은 어떤가? 우리의 안보를 언제까지나 주한미군에 의존할 수만은 없다는 자신의 확고한 자주국방 의지의 일환으로 임기 말에 추진된 것이 바로 제주 해군기지다. 한·미연합사해체와 전시작전권 환수가 마음에 걸렸던지 그 후속조치로 추진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또한 어쩌면 그의 이중성에 해당되는 계획이 아닌가 싶다. 여하튼 제주의 해군기지는 여간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제주 해군기지의 전략적 중요성은 점점 더 커지면 커졌지 작아질 수 없는 국제적 여건에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사례로 이라크 파병의 경우를 보자! 반미의식에 몰입되어 있는 노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취임이후 직면한 이라크 파병문제에 대해서 여간 고민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386세력이 핵심을 이루고 있는 집권세력내부의 성격 또한 미국의 파병요청에 선뜻 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결국 파병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미국에 생색 낼 여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가 이중성의 인간이었기 때문에서인가? 그의 유지를 받들겠다고 나선 추종세력들의 행보도 이중성이다. 말로는 노무현의 유지를 받들겠다고 하면서 실제 행동은 노무현이 뿌려놓은 갖가지 씨앗을 갈아엎고 있으니 말이다. 노무현의 그림자가 일그러져 있을 수밖에 없는 연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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