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운종가(雲從街)*에 나가 임금님의 거동을 구경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건장한 여종이 자주색 명주(明紬) 보자기로 한 처녀를 덮어씌워 등에 업고, 머리를 땋은 여종은 주홍색 비단신을 들고 뒤를 따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림짐작으로 보자기 안의 몸을 재어 보니 어린 여자 아이는 아니었다. 드디어 심생은 바짝 붙어 뒤를 쫓았다. 멀찍이 따르다가 소매로 스치며 지나가기도 하면서 눈은 한순간도 그 보자기를 떠나지 않았다. 걸음이 소광통교(小廣通橋)*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앞에서 일어나 자주색 보자기를 반이나 들추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녀가 나타나는데 복숭아 빛 발그레한 뺨에 버들가지 같은 가는 눈썹, 초록 저고리에 다홍치마, 연지분이 몹시 고와 설핏 보아도 절색이었다.

[A]처녀도 보자기 속에서 어렴풋하게 아름다운 소년이 쪽빛 두루마기에 초립(草笠)을 쓰고, 좌우 이쪽저쪽으로 따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추파(秋波)를 들어 보자기 밖의 소년을 한참 주시하던 중에 보자기가 걷히고 버들 같은 눈과 별 같은 눈동자 네 개가 부딪쳤다. 놀라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보자기를 당겨 다시 덮어쓰고 자리를 떴다.

심생이 어찌 그대로 놓치겠는가! 곧장 뒤를 쫓아갔다. 소공주동(小公主洞)* 홍살문 안에 이르러 처녀는 중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심생은 망연자실하여 한참을 배회하다가 이웃 노파를 붙들고 자세히 알아보았다. 늙어서 은퇴한 호조(戶曹) 계사(計士)*의 집이요, 딸 하나만을 두었고, 나이는 열 예닐곱이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는 등등. 처녀가 거처하는 곳을 물었더니 노파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좁은 골목을 따라가다 보면 회칠한 담이 하나 나올 거유. 담 안에 작은 집이 한 채 있는데 바로 처자(處子)가 거처하는 곳이라우."

노파의 말을 듣고 난 심생은 아무리 해도 잊을 수가 없었다. 저녁이 다가오자 집에다 거짓말을 꾸며 댔다.

"서당 친구가 저랑 밤을 같이 보내자고 하니 오늘 밤부터 가 볼게요."

드디어 인정(人定)이 되기를 기다려 그 집으로 가서 담을 넘었다. 초승달이 어스름 빛을 드리운 창밖에는 꽃과 나무들이 제법 아담하게 가꾸어져 있고, 창호지에 비치는 등불은 아주 환하였다. 벽에 등을 대고 처마 밑에 앉아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방 안에는 여종 둘이 함께 있었다. 처녀는 나직한 목소리로 언문 소설을 읽는 중이었는데 꾀꼬리 새끼가 우는 듯 낭랑하게 들려왔다.

삼경(三更) 무렵, 여종들은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처녀는 그제야 "훅!" 등불을 끄고서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무슨 고민이라도 하는 듯 몸을 뒤척거렸다. 심생은 잠이 들 리도 없었고 숨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새벽종이 울릴 때까지 그대로 있다가 담을 타고 나왔다.

그로부터 일과로 날이 저물면 가서 파루가 치면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한 지 스무날이 되었어도 심생은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처녀는 처음에는 소설도 읽고 바느질도 하며, 한밤에 등불이 꺼지면 잠도 잤으나, 번민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하였다. 예니레를 넘기자 "몸이 편치 않다."라고 말하고 겨우 초경(初更)인데도 베개를 베고 누워서는 자주 손을 던져 벽을 쳤고, 긴 한숨 짧은 탄식이 창을 넘어 들려왔다.

[B]하루하루 밤을 보낼 적마다 심해지던 스무날째 저녁, 처녀는 홀연히 마루 뒤쪽으로 나와서 벽을 따라 돌아 심생이 앉아 있는 장소에 이르렀다. 심생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불쑥 일어나 처녀를 잡았다. 처녀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은 소광통교에서 만났던 분이 맞지요? 소녀는 도련님이 여기를 찾아오신 지 벌써 스무날인 것을 잘 알아요. 저를 잡지 마세요. 소리를 지르기만 하면 다시는 여기를 나가지 못해요. 저를 놓아주시면 제가 틀림없이 이 문을 열어 맞이할 거예요. 어서 저를 놓아요."

심생은 곧이듣고 뒤로 물러서서 기다렸다. 처녀는 다시 빙 돌아서 방에 들어갔고, 그 다음에 여종을 불러 분부하였다.

"어머니한테 가서 큰 주석 자물쇠를 달래서 갖고 오너라. 밤이 아주 캄캄하여 겁이 난다."

여종이 안방으로 가더니 오래지 않아 자물쇠를 갖고 왔다. 처녀는 드디어 약속한 뒷문에다 문고리를 아주 분명하게 걸고 손으로 자물쇠를 채우되 일부러 "철거덕!" 거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바로 등잔불을 껐다. ㉠정적에 쌓여 잠이 깊이 든 듯했으나 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 이옥, 심생전 (沈生傳)

* 운종가, 소광통교, 소공주동 : 서울의 지명 * 계사 : 회사원

1. [A]의 주된 기능으로 적절한 것은?

①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 속도감을 준다.

② 긴장된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완시킨다.

③ 여자 주인공의 성격을 직접적으로 제시한다.

④ 전개될 사건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⑤ 작중 인물의 시점으로 바뀌어 변화의 묘미를 준다.

[문제읽기를 통해] 글 전체에서 [A]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특히 사건과 관련이 있는지 (①번과 ④번) 분위기와 관련이 있는지 (②번) 인물과 관련이 있는지 (③번과 ⑤번)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지문읽기와 문제풀이를 통해] 정답은 ④번이다. [A]의 앞부분에서 심생은 처녀의 아름다움을 보고 따라갔다. 그리고 [A]부분에서는 '추파를 들어 보자기 밖의 소년을 한참 주시하던 중에~' '놀라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등을 통해 처녀 역시 심생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A]는 앞으로 전개될 사건 (두 사람의 사랑)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2. [B]에서 '처녀'의 언행이 갖는 의미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다고 할 때,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처음부터 차분하게 행동한 것은 '심생'에 대한 호감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것일 거야.

②'심생'이 붙잡았을 때 놀라지 않은 것은 그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거야.

③겁이 난다고 한 것은 여종에게 자신의 의도를 감추기 위해서일 거야.

④여종을 안방으로 보낸 것은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을 벌기 위해서일 거야.

⑤문을 소리 내어 잠근 것은 자신의 거절 의사를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해서일 거야.

[문제읽기를 통해] 중요한 것은 '처녀의 언행'이다. 다른 인물이 아닌 처녀의 말과 행동을 잘 이해해야 답을 찾을 수 있다.

[지문읽기와 문제풀이를 통해] 정답은 ④번임을 알 수 있다. 처녀가 여종을 안방으로 보낸 것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자물쇠를 가져오게 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그 자물쇠로 "철거덕!"소리까지 내 가며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한 것으로 보아 ④번의 의견은 틀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의 상황에서 읊었을 만한 노래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마음속의 끝없는 사연을 세세하게 옮겨다가

달빛 비친 사창과 비단 휘장에 님 계신 곳 전하고자

그제야 알뜰히 그리워하는 줄 짐작이나 하실까

② 꿈이 날 위하여 먼 데 님 데려왔거늘

간절하고 반갑게 여겨 꿈 깨어 일어나 보니

그 님이 성나서 갔는지 간 곳이 없어라

③ 각시네 꽃을 보소 피는 듯 시드나니

옥 같은 얼굴인들 청춘을 매었을까

늙은 후 찾는 이 없으면 뉘우칠까 하노라

④ 꿈에 다니는 길이 발자취 날작시면

님의 집 창밖이 돌길이라도 닳으리라

꿈길이 자취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⑤ 아아 내 일이여 그릴 줄을 몰랐더냐

있으라 하였더면 갔으랴만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문제읽기를 통해] 일단 '시조'가 답지로 나오는 문제 유형은 많은 수험생들이 어려워 한다. 그러나, 보통 종장에 주제가 있음을 이해하고 풀면 의외로 쉽게 문제를 풀 수 있다.

[지문읽기와 문제풀이를 통해] 답지 하나하나를 종장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주제들이 나온다. ①은 '임에 대한 알뜰한 그리움'을, ②는 '꿈속에서나마 임을 잊지 못하는 간절함'을, ③은 '덧없이 흘러가는 청춘의 아쉬움'을 ④는 '임을 향한 내 발자취는 돌길조차도 닳게 하겠다.'라는 그리움을 노래한다. 그러나 ①~④ 모두 ㉠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에는 임에게 호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물쇠로 거절의 뜻을 밝혔고, 그 이후에 한탄 하면서 그리움 때문에 잠 못드는 처녀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⑤번 역시 '제 구태여' 임을 보내고 '그리워하는 정'이 나타나 있기 때문에 ㉠의 상황과 심정에 가장 유사하다. 그러므로 ⑤번이 답이다.

어휘력 tip

1. '날개 돋친듯이 팔렸다'가 맞아요? '날개 돋힌듯이 팔렸다'가 맞아요?

- '날개 돋친듯이 팔렸다'가 맞습니다. 동사 '돋치다'는 '돋아서 내밀다'의 뜻인데 '날개가 돋치다, 뿔이 돋치다'에 쓰이죠. 즉, '돋다'라는 동사에 강조의 의미를 나타내는 '치'가 붙어 '돋치다'가 된 파생어입니다. 비슷한 예로 '밀다→밀치다' '넘다→넘치다'가 있죠.

2. '짓무른 상처'가 맞아요? '진무른 상처'가 맞아요?

- '짓무른 상처'가 맞습니다. 동사 '짓무르다'는 '살갗이 헐어서 문드러지다'의 뜻으로서 '매를 많이 맞아서 종아리가 짓물렀다'에 쓰이죠.

3. '걷어들이다'가 맞아요? '거둬들이다'가 맞아요?

- '거둬들이다'가 맞습니다. 동사인 '거둬들이다'는 '거두어 들이다.'의 준말로서 '곡식이나 열매 따위를 한데 모으거나 수확하다'의 뜻입니다.

4. '부숴뜨리다'가 맞아요? '부서뜨리다'가 맞아요?

- '부서뜨리다'가 맞습니다. 동사인 '부서뜨리다'는 '단단한 물체를 깨어서 여러 조각이 나게 하다.'의 뜻인데 '꽃병을 부서뜨리다'에 쓰이죠. 또한 '짜서 만든 물건 따위를 제대로 쓸 수 없게 헐어지거나 깨어지게 하다'의 뜻도 있는데 '책장을 부서뜨리다'에 쓰입니다.  <이상 언어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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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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