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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속 미술여행]정선

2012-02-21기사 편집 2006-01-01 05: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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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성 거부한 진경산수화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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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조선 중기 진경산수화가·1676-1759)은 호로 겸재·겸초·난곡 등을 썼다. 몰락한 양반가에서 출생해 20살에 도화서 화원에 임용되었다. 중국 남화를 그리다가 30세를 전후하여 조선의 산수를 주제로 진경산수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절파화풍(중국 명대(明代)의 화파. 오파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절강성 항주 출신의 대진(1388-1462)을 시조로 해 명말의 람영에 이르는 직업 화가의 계보에 부여된 유파의 명칭)의 수묵법과 남종화의 화법, 그리고 음양의 원리를 그림에 조화시켜 생동감 있는 작품을 남기고 조선 후기 회화사에 큰 개혁을 가져왔다.

정선에 관한 기록과 작품 수는 많으나 책, 유고, 자작시나 화론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또한 초기 작품이 거의 밝혀지지 않아 그의 생애를 조명하는 데 공백이 있다. 그는 많은 기록화를 남겼으며, 진경산수화를 확립한 화가로 84살에 죽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동료들은 "화가가 끊어졌다"며 통곡했고, "일생동안 이름을 떨쳤으니 땅에 묻힌 뒤에도 썩지 않을 것"이라는 추도문을 남겼다.

예술가는 독창적인 자기만의 창작 세계를 이룩하였을 때 그 의미가 부여된다. 그러나 당시 서울 화단은 중국 송, 원, 명대의 그림들을 그대로 옮겨 그리고 있었다. 중국의 그림은 천년을 넘게 그려온 삼라만상이 객관화되고 집약되어 이미 관념적이고 이상화되어 있었다. 이것을 따른다면 우리의 자연, 독창성, 개성은 없어지고 만다.

겸재는 우리 산하를 바라보고, 뜻을 새겨보고, 특징을 가늠하여보고, 어떻게 화폭에 담을 것인가를 고민하며 자기 회화의 세계를 그려냈다.

그의 남송화풍 산수화의 대소 작품들은 북송화풍 일변도의 당시 화단에 새로운 입김을 불어넣었다. 이렇게 겸제가 뿌린 씨앗은 훗날 단원 김홍도의 예술에서 열매를 맺었다. 즉 겸제의 진경산수가 지니는 의의는 정형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한국 산수화 정립의 정석을 뜻한다 하겠다.

그는 회화 기법상으로는 전통적 수묵화법이나 채색화의 맥을 이어받기도 하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필묵법을 개발하였다. 이것은 자연미의 특성을 깊이 관찰한 결과이다.

이 기법은 다른 화가들에 비하여 아주 다양하여 정밀 묘사법에서부터 간결하고 활달한 사의화(묘사 대상의 생긴 모습을 창작가의 의도에 따라 느낌을 강조하여 그린 그림)까지 있어, 자연에서 얻은 인상을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과감성과 회화의 원리를 발전시키는 등 여러 단계의 작품을 보여 준다.

이 가운데 특히, 우리 주위에서 친숙하게 대할 수 있는 구체적 자연을 특징짓는 기법이 독창적인 면이다.

서원소정도(西園小亭圖·수묵채색화·견본담채·67.5×40cm·1740)는 당시 정3품의 동료였던 이춘제를 위해 그렸던 그림이다. 자세히 보면 우측상단에 세심대, 좌측에 옥류동이라는 글씨가 있다. 이춘제의 저택과 후원의 위치를 알려주는 이 지명은 현재 서울 옥인동 근처에 해당한다.

인왕산의 능선을 따라 친구의 저택이 있었다. 산등성이 아래, 담장으로 구획된 넓은 뜰의 경계와 화면 아래 언뜻 보이는 기와집은 그의 사회적 지위와 부를 암시한다. 그는 평소 친분있는 주변 문인들의 집이나 정원을 자주 그렸으며, 부와 권력의 상징인 집이 집주인과 동일시되는 느낌의 그림을 그렸다.

즉, 집을 집주인과 동일시하면서 자화상의 대상으로 그렸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춘제는 자택 후원인 서원(西園)을 다시 꾸미면서 정자를 지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병연에게 축시를, 정선에게 서원의 풍경화를, 조현명에게 정자에 대한 기록을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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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2현광덕 미술교육가·조각가·대전 와동초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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