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포럼- 박찬종 특구본부 대덕기술사업화센터장

벌써 27년 전의 일이지만 항상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기억이 하나 있다. 당시 전산학과 대학원 컴파일러 과목을 수강했는데, 한 학기 동안 미니 컴파일러를 만드는 프로젝트를 한 적이 있다. 3-4명씩 팀을 구성하여 컴파일러를 만들고, 샘플 프로그램 하나를 정해서 컴파일한 후, 그 결과와 실행시간을 재보는 것으로 평가를 받기로 했었다. 최종 평가를 받는 날, 다섯 팀 모두 컴파일 결과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실행시간을 재본 결과 우리 팀은 0.1초 차이로 2등을 했다. A학점을 기대했는데 교수님의 평가는 냉정하게도 B로 나왔다. 아쉬운 나머지 평가 결과에 대해 팀원을 대표해서 교수님께 항의하는 무례를 범하고 말았다. 그러나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한마디 말도 더 해보지 못하고 그 방을 나와야만 했다.

요지는 이러했다. "너희가 만든 컴파일러를 이용하면 한 번에 0.1초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하루에 수십 번 이용한다고 보면 1-2초 차이가 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컴파일러를 우리나라 프로그래머 전체가 쓴다고 보면 하루에 수천-수만 초(약 5시간으로 기억함) 차이가 날 것이고, 일 년이면 약 70일, 3년 동안 쓰게 될 경우 약 200일 차이가 나는데, 우리나라의 경쟁력은 어디서 확보하냐?"는 것이다.

내가 무시한 0.1초가 3년 동안 200일을 손해 보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A학점은 어림없다는 말씀과 함께, 앞으로 프로그램을 할 때는 단 0.1초라도 줄이는 것이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사람의 경쟁력이 될 것이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라는 말씀이셨다. 이 말씀에 누가 토를 달고 항변할 수 있을까?

하지만 최근에 읽은 `Fast Second`라는 책을 보면서, 0.1초 차이가 아니라 백 배 천 배라고 할 만큼 큰 차이가 나게 할 수 있는 감춰진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 간발의 차이가 아니라 아예 50~60미터 앞에 서서 100미터 달리기를 할 수 있는 전략이기에 우리 대덕특구의 기업에게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기술력을 갖춘 벤처기업들은 대부분 선발주자(First Mover)이며 시장개척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벤처기업들은 우수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어 신시장을 개척하려는 의지가 강할 뿐만 아니라 혁신적인 기업가 정신(혹자는 엔지니어의 X고집이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으로 똘똘 뭉쳐 있다. 하지만, 시장개척자로는 인정을 받으면서도 시장지배자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왜 중소 기술벤처기업은 시장지배자가 되기 어려운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이 책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선발기업이 시장을 지배하지 못하는 까닭은 태생적 한계에 기인한다고 말하고 있다. 신시장을 개척하고자 하는 선발기업은 대개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일 가능성이 높다. 즉, 대기업의 벽을 뚫고 새로운 시장을 진출하기 위한 빠른 의사결정이 대기업보다 유리하다. 그러나 중소기업은 아이디어와 기술력은 있으나 자금력과 마케팅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둘째, `Fast Second` 전략이 시장을 지배하는 데 매우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전략은 주로 대기업(또는 혁신적인 중견기업)들이 구사하고 있는데, 핵심기술을 점진적으로 확보해가면서 진입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가, 시장에서 지배적인 기술과 디자인이 먹혀들 때가 됐다고 판단하는 순간이 오면 자금과 마케팅 능력을 최대로 쏟아 부어 일시에 시장을 지배해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지혜로운 후발주자는 멍하니 있다가 장사가 된다 싶어서 뛰어드는 돈만 있는 멍청한 기업이나 단순히 모방으로 성공하려는 기업과는 차원이 다른 상대이기 때문에 중소 기술벤처기업이 성공하기 위해서 가장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이 책의 저자인 런던 경영대학원 마르키데스 교수와 게로스키 교수는 "시장에 최초로 진입한 기업이 후발기업에 비해 경쟁우위를 갖는다.(Fist Mover Advantage)"라는 일반적인 믿음을 부정하고 있으며, 심지어 "안정된 기존 대기업이 신시장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작은 신생기업의 창의성과 도전정신을 배워야 한다"는 기존의 믿음도 그저 신화에 불과하며 기업에는 심지어 해가 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대덕의 기술벤처기업도 이제는 시장의 개척자와 지배자 개념을 확연히 구별했으면 한다. 즉, 신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 시장에 먼저 들어가 열심히 기업 활동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핵심기술과 지적재산권(IP)을 미리 확보하면서 재빠른 2등 전략에 대비하는 지혜로운 기업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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