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성 대전 유성성당 신부

내가 K씨를 만난 것은 지난해 새봄이 시작될 무렵 한기가 채 가시지 않은 때였다. 기도를 끝내고 들어오는 사제관 앞에 케이크가 덩그렇게 놓여 있었다. 보름이 지났을까. 또다시 같은 제과점의 케이크가 외출하고 돌아온 집 문 앞에서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일까. 누군가 사연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냥 또 잊어버리고 말았다.

봄볕이 제법 따스하게 내리쬐는 오후 미남형 외관에 흰 피부, 깔끔하게 면도해 도회풍의 지적인 이미지가 흐르는 한 낯선 사람이 성모상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불안한 시선과 힘없는 발걸음에 처진 어깨는 그의 호남형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현대 추상 미술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사제관으로 들어가려다 그의 모습이 도움을 간곡히 청하는 것 같아 가벼운 인사를 했다. 갑자기 선하긴 하지만 불안이 가득한 눈길로 K가 말했다. "신부님 죄인이 죄를 지은 자가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저는 커다란 죄를 지었습니다." 절규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의 입가에서 술 냄새가 진동하였고 그의 볼은 불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용서는 하느님이 베푸시는 것, 그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셨지요. 인간이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는 생각은 하느님을 과소평가한 것입니다." 그는 어느새 떨리는 손으로 내 두 손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의 고통스런 마음이 강하게 전해졌지만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답답하였다.

묻기보다 그가 스스로 이야길하길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입을 떼었다. "저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제 이 두 손으로 말입니다." 그날 그는 끝내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고 떠났다.

케이크의 세례는 간간이 이어졌다. 몇 번 더 그는 나의 두 손을 잡고 하느님의 죄 사함에 대해 의문을 이야기했고, 나는 그때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며 기도해 주었다.

가을빛이 정원에 가득하였다. 성당 정원에 그가 서 있었다. 꾸부정한 어깨에 살짝 닿기라도 한다면 금방 무너져 내릴 듯한 자세로. 그는 마치 그림의 한 배경이 된 듯싶었다. 만취 직전까지 간 그가 내게 말했다. "신부님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두 사람이나 말입니다."

그가 오랫동안 닫아두었던 말문을 열었다. 그는 북파간첩이었다. 서울의 유수한 약대를 나와 ROTC 훈련을 마치고 장교가 된 그는 특수부대에 차출되어 훈련을 받고 부대원들과 함께 비무장지대를 지나 북파되었다. 밤에 움직이고 낮에 쉬면서 사명을 완수한 다음 돌아오는 마지막 길에 어려움을 만난다. 따라오는 북한군을 따돌리기 위해 두 명의 부대원을 남겨두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둘을 북에 남겨놓고 남한으로 귀환하였다. 그 후 그들의 소식은 접할 수 없었고, K는 부대장으로서 끝까지 그들에 대한 책임을 완수하지 못한 자신의 태도에 큰 죄책감을 느낀다.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지탱할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가 찾은 도피처는 술이었다. 밤낮으로 술에 의지해 살아가다 보니 가정이 무너지고 부인도 떠나갔다. 지금까지 그를 지탱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파괴한 죄책감이었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씨시가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고향이다. 그곳에 `천사들의 모후`라는 성당이 있는데, 성자 프란치스코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가 착용하고 다니던 띠가 지금도 그곳에 보관되어 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그의 친구들에게 주며 말한다. "이 수도복은 제 것이 아니라 수도원장님의 것이니 수도원장님에게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세상에서 그를 감싸주던 옷을 벗고 맨몸으로 땅 위에 누워 영원한 세상으로 떠난다. 버려야 가벼워지는 것이다. 버려야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다.

K에게 말했다. "프란치스코가 그간 입어온 그 옷은 너무 무겁고 힘겨운 것입니다. 그간 입은 것으로 충분한 보속을 하였으니 이제 벗으십시오.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 그 짐을 맡기십시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그 두 영혼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몇 개월이 지난 것 같다. 그를 다시 보지 못한 것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알코올클리닉에 가라 했는데 그때 그의 야무지게 다문 입술 사이로 단호하게 나온 말은 "예 건강해져서 다시 오겠습니다"였다.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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