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시인·공주문화원장

또다시 세밑이다. 한 해가 저물고 다시 한 해가 밝아 오는 길목. 언제고 이맘때면 스산한 마음이다. 어라, 벌써 이렇게 되었나? 더러는 당황하기도 할 것이요, 더러는 옷깃을 여미는 마음이 되기도 할 것이다. 새삼 세월의 빠름을 느낀다. 지난해 세상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고 나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가? 과연 나는 무슨 일을 위해 살았던가? 가슴 태우기도 하고 발을 동동거리기도 했던 모든 일들이 어쩌면 주마등처럼 흐르기도 할 것이다.

세월의 빠름을 보다 더 실감하는 축은 아무래도 나이 든 사람들일 것이다. 아이들, 젊은이들이야 저들의 앞길이 창창하니까 얼른 한 해가 가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싶어 하기도 할 것이요, 저들의 삶이 꾸지꾸지하다면 얼른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선물로 받고 싶기도 할 것이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것을 옛날 어른들은 즐겨 송구영신(送舊迎新)이란 말로 표현했다. 옛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는다는 뜻이다. 나도 가끔 이렇게 세밑 어름에서는 주변의 젊은이들로부터 새해의 계획이나 설계에 대해서 질문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난감한 느낌을 가지며 마땅한 답을 찾으려 하지만 잘 떠오르지 않는 것이 또 그 대답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처럼`이란 말로 얼버무리곤 한다.

생각해보면 `지금`이란 말처럼 소중한 말도 없지 싶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시간이란 것은 하나의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과거는 흘러간 지금이요, 미래는 오지 않은 지금이다. 오직 있다면 현재인 지금이 있을 뿐이다. 그걸 인간의 지모와 편의에 의해 시간이란 것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과거를 자랑하거나 아쉬워하는 일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고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과도한 희망을 거는 것처럼 허황된 일은 없다.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 대답은 매우 쉽고도 분명하다. 현재에 충실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 지금껏 내가 알고 있는 말 가운데 부처님이 돌아가실 때 하셨다는 "만물은 변한다"란 말처럼 훌륭한 말씀도 없지 싶다. 오직 `만물은 변한다는 것만이 변하지 않는 진리`란 생각이다. 우리가 슬프다, 외롭다 말하는 것도 우리가 이 변한다는 것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아서 생긴 감정의 찌꺼기들이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여기`에 대한 것이다. 늘 우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거기`나 `저기`에 눈과 귀를 돌리며 살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립다 하고 아쉽다 하는 것이다. 먼 것을 꿈꾸고 때로는 떠남을 감행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 `저기`나 `거기`가 아닌 오직 `여기`에 눈을 돌리고 발 밑을 살피며 살아야 한다. 생각해 보면 그런 것들이 모두가 철없을 때의 부질없는 망상과 허욕에서 생기는 것들이다.

다시 한 번 대답은 간단명료해진다. 우리는 마땅히 지금, 여기에 충실하여 살아야 한다. 인간은 유한한 생명을 사는 존재이므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나서는 결코 살 수가 없다. 완전히 자유스런 독립개체가 아니란 말씀이다. 지금이라는 시간성과 현재라는 공간성 안에서만 생존을 보장받을 수 있는 우리들. 무엇보다도 또 중요한 것은 일상의 소중성을 발견하는 일이다.

흔히들 우리의 삶을 그날이 그날이고 지루하고 권태로운 삶이라고, 구태의연한 하루하루라고 타박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오해다. 한 꺼풀 벗지 못해서 그렇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그 무엇도 똑같은 것은 없다.

반복되는 것들도 없다. 유일한 것이고 순간적인 것이고 일회적인 것이고 변화하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새로운 것이란 말이다. 아침에 돋는 해라고 해도 똑같은 해는 없다. 오로지 하나밖에 없는 해인 것이다. 가족이나 직장동료라 해도 오늘 새롭게 태어난 새로운 가족이나 직장동료란 말이다.

그렇다면 소중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일상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에 눈을 떠야 한다. 이것은 하나의 깨달음과 같고 발견에 준하는 일이다. 이러한 일상의 소중성만 알게 된다면 모든 것이 확 달라질 것이다. 소망하는 행복이란 것도 쉽게 그 실체가 확인될 것이다. 동화책에 나오는 대로 행복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나와 함께 상존하는 그 무엇이란 얘기다.

오늘날 우리는 스스로 가난하고 외롭고 소외되었다 말하지만 그 가난과 외로움과 소외란 것도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낸 허상이요 하나의 자기최면에 불과한 것이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진정 외로운 사람, 진정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외롭다는 것, 불행하다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들이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며 마땅히 우리는 `이것밖에 안 남았느냐?` 투정할 일이 아니요, `아직도 이렇게 많이 남았느냐!` 감사하고 대견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다.

이미 우리는 1년 치, 삼백 예순 다섯 개의 해님과 달님과 수없이 많은 꽃과 나비와 산들바람과 소낙비와 구름과 새소리를 공짜로 선물 받기로 예약된 행복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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