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때문에 좌절하는 우리의 눈물

정소영
정소영
적당히 리듬을 타며 흔들거리는 시내버스의 스피커에서 배인숙의 ‘누구라도 그러하듯이’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스산한 초겨울의 대기를 뚫고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버스창가에는 언뜻보아도 모자지간으로 보이는 백발의 할머니와 초로의 중년 남자가 말없이 앉아있다. 이들은 이어서 도심의 터미널에 도착하여 대합실로 들어선다. 이때 자리에 앉자마자 백발의 할머니가 어린애 처럼 떼를 쓰며 배가 고프다고 칭얼대기 시작하더니 아들로 보이는 중년남자에게 아빠라 부르는 것이 아닌가. 바로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무일푼인 가난뱅이 아들이 도시를 떠나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이다. 허나 아들은 가뜩이나 빚쟁이에게 쫓기면서 딱히 어머니를 보낼 곳이 없다. 형이란 사람은 자기 가족 하나도 건사하기 벅차다며 치매 어머니의 부양을 거부하고 친구들은 아예 그의 연락에 면박과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다. 비참함을 무릅쓰며 아들이 돈을 빌리려 애를 쓰는 사이, 치매 어머니는 아들이 묶어 놓은 줄을 풀어달라며 옆에 앉은 여대생에게 떼를 쓴다. 영문을 알리없는 여대생은 그 모습에 깜짝놀라 줄을 풀어주고는 배가 고프다며 막무가내인 할머니에게 가락국수 한 그릇을 대접한다. 여대생은 자신이 물어보는 말에 동문서답으로 응대하는 할머니를 답답해하다 아들이 할머니의 팔목에 보호자와 연락처를 적어서 채워준 팔찌를 보게되고 이를 자세히 보려하던 중 할머니에게 느닷없는 뺨 세례를 선사 받는다. 같은 시각, 어머니가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된 아들은 당황하며 애타게 어머니를 찾아 헤매게 된다. 한편, 호의를 배풀다 당한 일에 억울하고 황당해진 여대생은 하는 수없이 경찰에 도움을 요청한다. 그런데, 이때 잠시나마 제정신이 돌아온 할머니는 지금의 상황을 알아차리고는 남몰래 자신에게 채워진 팔찌를 풀어내더니 식당의 쓰레기통에 버리고마는데….

달력의 달을 나타내는 숫자가 두자릿수로 접어들며 날이 갈수록 차가워지는 공기는 기실 가난하고 곤경에 처한 이들에게 현실의 냉엄함을 체온을 통해 일깨워주곤 한다. 영화는 초겨울의 스산함을 배경으로 지금은 사라져버린 대전 동부 고속 터미널이라는 공간을 주무대로 삼는다. 이 터미널이라는 공간은 떠나고 돌아오는 이들의 시간으로 가득차있기 마련이다. 무수히 많은 이들의 이야기와 사연들이 무심히 흘러가는 그곳에 찾아든 초로의 모자또한 그리 흘러가는 수많은 사연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수도 있다. 백발의 어머니는 치매에 걸려있고 중년의 아들은 오갈데 없는 무숙자 신세가 되어 버렸다. 이들은 어딘가로 생존을 위해 떠나가기위해 터미널을 찾아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오라고 반기는 곳은 지금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딘가로 떠나가야 할 서러움과 먹먹함에 더해 그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는 절망이 교차하여 엄습해오는 현실은 치매 어머니에 대한 부양의 의무와 자신조차 사회의 낙오자가 되어버린 좌절의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 중년 아들의 처지와 포개어 진다. 영화는 배인숙의 노래 ‘누구라도 그러하듯이’가 품고있는 예의 그 신파적 느낌과 상황을 결말에 응집시켜 놓는다. 결말부분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선택한 이별은 신파적인 장치임과 동시에 이전까지 차갑고 무심한 터미널의 분위기를 통해 전달하던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에서 갑작스레 이루어지는 일종의 반전적 요소라 할 수있다. 동원된 강제적 식민 근대화 시절 민족적 비극과 개인적 서러움의 한서림이 만들어낸 신파는 이렇게 나이 어린 연출자의 시선으로 포착되어지고 표현되어질 정도로 현실의 냉혹함을 살아내야 하는 현대의 대한민국에서 아직까지 그 생명력과 존재가치를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신파성이 영화의 완성도에 기여한다기 보다 결말을 위한 인위적 요소로 느껴지는 부분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현실의 냉혹함을 신파적 장치로 환기시키려는 의도와 시도는 인정할 수있으나 설득력과 공감성을 이끌어내는 자연스러움의 부재가 결과적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깎아내는 지점은 진한 아쉬움이 남기 때문이다. 감독의 다음 작품에선 자연스러움을 품은 신파가 목도되기를 기대해 본다.

감독 프로필

정소영

- 2006년 <좋아한다고 생각해>

2007년 대전독립영화제 본선 경쟁

- 2007년 <흐림 때때로 비>

2007년 제3회 대한민국 대학영화제 경쟁 본선

2008년 대전독립영화제 본선 경쟁

2008년 제3회 공주대학교 영상공모전 (KUMIF) 테크놀러지상

- 2008년 <그녀에게 말하다>

2008년 대전독립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언급

2008년 메이드 인 부산 초청상영

2009년 제9회 대한민국청소년영화제경쟁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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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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