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종 교수(충남대학교 사학과)

장 멜리에 신부는 1664년에 프랑스의 아르덴주에서 태어났다. 어떠한 시대인가? 프랑스에서는 1598년 낭트칙령으로 시작된 가톨릭과 위그노(칼뱅파)의 불안한 동거가 서서히 끝나고, 1685년에는 위그노에게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강요하는 야만적인 명령이 내려진다. 독일에서는 전 인구의 절반을 희생시킨 참혹한 30년 종교전쟁(1618-1648)이 끝나고,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높아가고 있었다. 악이 선을 이기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신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더라도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성(理性)이 부활하면서, 더 이상 멀쩡한 사람을 마녀로 몰아 처형하는 광기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연과 초자연을 분리하고, 초자연에서 나와 자연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스피노자(1632-1677)는 ‘신 즉 자연’이라는 범신론적 테제를 내세워 자연이 신의 피조물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창조론을 부정하였다. 스피노자 이전에도 무신론자라는 비난을 받은 사람은 많았으나, 스피노자야말로 ‘체계적인’ 무신론자였다. 다시 말하면 철학적으로 그리스도교를 부정한 사람이었다. 1687년, 뉴턴은 ‘프린키피아’에서 우주는 일정한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고 주장함으로써 ‘신’이 개입할 여지를 없애버렸다. 장 멜리에 신부가 살았던 시대는, 폴 아자르가 말한 대로, 유럽인들의 의식이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겪던 시대였다.

그 시대에 무신론을 감추고 살아갔을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장 멜리에 신부가 있었다. 장 멜리에 신부는 신학교를 마친 뒤 1689년에 아르덴의 에트레피니라는 인구 165명의 작은 마을의 주임신부로 부임해 그곳에서 40년을 지내고 1729년에 사망했다. 그는 사제로서의 일과가 끝나면 신학자로서 철학자로서 사유하고 집필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몽테뉴, 바니니, 라브뤼예르, 라보에시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페늘롱, 파스칼, 말브랑시 같은 당대의 작가들은 물론이고 세네카, 타키투스, 티투스 리비우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작품도 그의 서재에 있었다. 장 멜리에는 고전을 읽고 동시대인들의 논쟁에 참여하고 고뇌하는 신부였다. 그가 유언처럼 남긴 ‘장 멜리에의 사상과 느낌의 기록’을 싼 회색 종이 위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나는 인간의 오류, 남용, 허영, 어리석음, 악함 등을 보았다. 나는 그것들을 미워하고 증오했다. 나는 살아 있을 때는 감히 그것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죽어가면서 그리고 죽음 이후에는 그것을 말할 것이다.’

장 멜리에 신부가 살아 있을 때는 감히 말하지 못하고, 죽음 이후에 교구민들에게 말하려 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일체의 종교는 착취이고 사기(詐欺)라는 것이다!

장 멜리에의 무신론은 사제로서의 경험과 철학적인 사유의 결과이다. 그의 무신론에서는 데카르트의 기계주의, 몽테뉴의 회의주의, 그리고 당대에 유행했던 에피쿠로스의 유물론 등을 발견할 수 있다. 장 멜리에는 구체적으로 8가지 논증을 제시한다. (1) 종교들은 자기모순적이다. (2) 신앙은 이성의 자연적인 빛과 배치된다. (3) 예언자들이 보았다는 것은 미친 사람들의 환영(幻影)이다. (4) 예언들은 실현된 적이 없다. (5) 기독교 도덕은 자연의 가르침과 모순된다. (6) 그리스도교는 정치권력과 공모하여 착취한다. (7) 무신론은 세계의 시초부터 시작된 오래된 사상이다. (8) ‘영혼은 죽는다’는 사상 역시 무신론만큼이나 오래된 사상이다. 장 멜리에의 양심고백에는 당시대의 철학적 논쟁이 온전히 녹아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그리스도교는 교회와 정치가들이 어리석은 대중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낸 픽션이라는 것이다.

신부는 왜 생전에 그리스도교를 포기하지 않았을까? 그는 공개적인 서품 취소와 같은 수모를 피해 조용히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담담하게 이유를 밝힌다. 17세기에도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신부의 이러한 조심성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신부는 이중생활을 했지만 위선자는 아니었다. 그는 교구청의 지시를 따르지 않기도 했고, 마을의 귀족과 마찰을 빚기도 했지만,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선행을 했다. 강론을 할 때에는 간접화법을 사용함으로써 나름대로는 거짓말을 피하려고 노력했다.

17세기 한 좌파 신부의 양심적인 이중생활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는가? 신이 있고 없고 하는 문제는 신부에게는 정말 중요한 문제였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나는 신부의 일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멜리에 신부는 거짓말과 거짓행동을 했음을 고백하는 유서를 남겼지만, 우리 시대의 그 많은 위선자들은 언제 양심고백을 할 것인가? 거짓말이 진실을 이기는 시대, 거짓말을 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공격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시대가 우리 시대이다. 거짓말쟁이, 사기꾼, 위선자들이 양심적인 인사가 되고 대중의 지도자가 되기 쉬운 시대가 민주주의 시대이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주인인 ‘민’이 깨어 있어야 한다. 속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발을 붙일 수 없다.

김응종 교수(충남대학교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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