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찬란했던 고구려 역사

보호각에 싸인 광개토대왕비
보호각에 싸인 광개토대왕비
그 옛날 만주 일대를 호령했던 고구려인들의 늠름한 기상과 숨결을 접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인천 국제여객터미널을 출발해 17시간의 지루한 항해 끝에 내린 중국 대련에서 버스로 5시간 정도 달려 북한과의 접경지역인 단동으로 간 뒤 이곳에서 다시 4시간을 더 가서야 고구려 역사가 시작된 환인현을 만날 수 있었다.

환인의 도심 번화가를 10여분 벗어나자 저 멀리에 우뚝 솟은 바위 절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졸본성이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이 나라를 세우고 최초로 쌓은 성이다. 졸본성은 BC37년부터 국내성으로 천도한 AD3년까지 40년간간 고구려의 수도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중국은 산 정상에 있는 천지(天池)라는 연못에서 다섯명의 선녀가 목욕을 했다는 전설을 내세워 졸본성의 이름을 오녀산성으로 바꿔 부르고 있었다.

해발 820m의 산꼭대기에 세운 졸본성은 남·서·북벽이 100여m 정도의 깎아지를 듯한 절벽을 이루고 있는 천연요새다. 굳이 성벽을 쌓지 않아도 적들이 접근할 수 없는 철옹성이다. 때문에 고구려는 남동쪽과 동쪽에만 성벽을 쌓았다. 지금도 당시에 쌓은 성벽이 2000여년의 장고한 세월을 견딘 채 서 있어 고구려의 훌륭한 축조 기술과 기개를 엿볼 수 있다.

급경사에 설치된 999개의 돌계단을 딛고 정상에 올라서면 환인을 비롯한 주변지역이 한눈에 들어와 주몽이 왜 이처럼 높은 곳에 도읍지를 정했는지 이유를 금방 알 수 있다. 정상에는 남북 1㎞, 동서 300m의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고 지금까지 한 번도 마른 적이 없다는 샘과 왕궁터, 집터, 초소지 등 수많은 유적지들이 당시의 숨결을 전해준다.

주몽과의 첫 만남을 뒤로 하고 북쪽으로 4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집안시다. 집안시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있는 곳이다. 국내성은 장수왕이 서기 427년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400년동안 고구려의 도성이었다. 네모꼴로 잘 다듬은 돌로 쌓은 국내성은 총길이가 2686m에 달했으나 지금은 남서쪽 성벽 약간만 남아 있을 뿐 거의 훼손되어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다.

집안시는 고구려 유적의 보고다. 대왕릉, 장수왕릉, 오호묘 등 1만 2000여기의 무덤이 몰려있고 광개토왕릉, 환도성 등 무수한 유적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국내성에서 4.5㎞ 떨어진 곳에 위치한 대왕릉은 한변의 길이가 63m, 현실의 천장 높이만 18m에 달하는 거대한 돌무덤이다. 광개토대왕비와 500m 밖에 떨어지지 않아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관리 소홀 등으로 외부에 쌓아 올린 돌들의 상당부분이 무너진 채 방치돼 원형을 잃고 있었다. 대왕릉에서는 소를 이용한 우경이 행해졌음을 입증시켜주는 쟁기 등 농기구들이 출토돼 고구려의 농업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고구려 20대 장수왕이 부왕인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광개토대왕비는 1700년의 풍파를 견디고 아직도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높이 6.39m, 폭 1.5m, 두께 1.53m의 사면석비로 건립됐으며 4면에 모두 1775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고구려 건국신화와 비의 건립 경위, 대왕의 정복활동과 영토관리, 능을 지키는 사람들의 명단 등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당시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비는 본래 비석만 있었으나 지금은 중국 정부가 세운 보호각에 둘러쌓여 있다.

대왕릉과 마주 보는 멀지않은 곳에는 장수왕릉이 웅장한 자태로 서있다. 413-490년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장수왕릉은 피라미드 형태로 만든 고구려의 대표적인 적석묘다. 높이 12.4m, 변 길이 31.6m의 7단 계단식 사각형 피라미드 형태의 능은 1100개의 화강암을 정확한 규격으로 잘라 쌓아 고구려인들의 정교함을 엿볼 수 있다. 장수왕릉은 각 변마다 3개씩의 엄청난 크기의 돌을 기대어 세워 놓았는데, 북쪽 가운데 돌이 사라져 지금은 11개만이 존재한다. 이로 인해 균형이 무너진 능의 북쪽부분은 틈새가 벌어지고 일부는 내려앉는 등 붕괴 직전에 처해 있다.

대왕릉과 가까운 곳에는 고분벽화가 새겨진 5기의 고분이 있는 오회분이 자리잡고 있다. 그중 내부를 공개한 묘는 오호묘가 유일하다. 7세기초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오호묘는 내부에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와 신들을 형상화한 설화, 각종 문양 등이 짜임새 있게 그려져 있다. 돌 위에 동식물, 광물의 염료를 사용해 벽화를 그려 13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집안시에서 2.5㎞ 떨어진 곳에는 적이 침입했을 때 임시로 옮겨 전쟁을 치렀던 방어성인 환도산성이 있다. 평상시에는 국내성에서 거주하다가 비상시 이곳으로 피난해 전쟁을 치르는 기능을 했다고 한다. 해발 676m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해 축조한 성은 현재 일부 성곽과 전망루가 남아 있으며 최근에는 왕궁터와 대규모 건물 기초부가 발굴돼 고구려의 슬기로운 수도 방어체계를 엿볼 수 있다.

1000년 동안 광활한 만주를 호령했던 고구려. 지금은 비록 이국땅으로 변한 중국에서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그 기개와 찬란한 문화는 여전히 후손들인 우리의 가슴 속에 전해지고 있었다. 이석호 기자 ilbolee@daejonilbo.com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피라미드형태의 장수왕릉
피라미드형태의 장수왕릉
고구려 첫 도읍지 졸본성
고구려 첫 도읍지 졸본성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