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발해, 우리 역사 일부” 주장

발해의 수도였던 동경성 상경용천부 성곽
발해의 수도였던 동경성 상경용천부 성곽
당나라와 신라에 의해 폐망의 길을 걸었던 고구려를 계승해 228년간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의 광범위한 영토를 지배했던 발해는 우리나라의 역사의 맥을 지켜온 또 다른 축이었다. 고구려가 멸망한지 30년 후인 서기 698년 대조영은 당나라가 쇠퇴해진 틈을 타 만주 일대에 흩어져 있던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 세력을 규합해 발해를 건국했다. 건국 당시 발해는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이어받겠다고 천명하는 등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대·내외에 선포했었다. 이를 입증하듯 발해는 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영토 확장에 나서 옛 고구려의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는 강력한 국가로 발전했다. 발해는 926년 요나라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만주의 주인이었다.

가장 오랜 기간동안 수도 기능을 했던 상경용천부(상경성)는 외성, 내성, 궁성 등 3중으로 장방형의 성을 쌓았고 그 안에 중앙대로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개설된 도로를 따라 82개의 방이 있었던 것으로 발굴 조사에서 밝혀졌다. 또 내부에는 제1궁전인 대궁전을 비롯해 5개의 궁전이 존재했고 궁전들은 모두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찾아간 발해 유적지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중국 당국은 발해를 자신들의 역사의 일부분으로 편입시키는 등 찬란했던 역사와 문화를 폐허로 만들어 놓고 있어 씁쓸함만 안겨줬다. 현재 상경용천부 유적지는 화려했던 궁궐의 모습은 간데없고 현무암으로 쌓은 성곽 일부와 궁전터, 회랑터 등만이 쓸쓸히 발해의 기상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궁내에는 잡초와 코스모스 단지가 대신하고 있었고 성곽 밖에는 옥수수밭이 점령하고 있었다. 유적지 인근에 마련해 놓은 발해 박물관도 기와편과 석등, 철제 칼, 토기편 등 몇 종류에 그치고 있다. 인근에 위치한 대표적인 사찰인 흥륭사는 석등을 제외하고 모두 중국풍으로 바뀌어 발해를 보는 중국의 시각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석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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