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호 대전시기독교연합회 회장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되었을까? 건강한 모습으로 대한민국 육해공군 해병대에 입대한 조국의 아들들이 이렇듯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야 하는 지경이 되었으니 가슴이 미어진다. 기수열외와 작업열외 그리고 이런저런 이유로 조직에서 왕따를 당하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게 되는 우리의 아들들을 보노라면 통곡할 지경이다. 올해 유난히 길어지는 장마와 폭우로 인해 도시 농촌 가릴 것 없이 음울한 장마가 몰려왔듯 대한민국 부모들의 가슴에도 피눈물의 장마가 진다. 사랑하는 친구, 형제, 오빠, 동생을 떠나보내는 젊은이들의 가슴속에도 원통함과 서러움이 빗줄기 되어 각자의 가슴을 타고 내린다.

이뿐인가. 먹고살 만하게 되었는데 전국의 가정마다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급기야는 OECD국가 중 이혼율이 1, 2위를 다투고 있다. 동방예의지국이며 살가운 가족문화의 모판이었던 우리나라가 세계인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어디서부터 첫 단추가 잘못 채워졌는가?

국토가 좁고 인구가 많아 경쟁하지 않으면 도무지 생존할 수 없는 참혹한 과거사를 지닌 우리들이기에 세계경제대국을 꿈꾸는 지금도 소유에 대한 끝없는 추구와 몸에 익은 경쟁주의의 그림자들이 우리의 삶을 정글의 법칙이 움직이는 자본주의 현장으로 내몰고 있다.

시대를 꿰뚫었던 안목을 지닌 사상가이며 정치가로 존경을 받았던 간디는 도덕 없는 상업(Commerce without Morality)과 인간성이 결여된 과학(Science without Humanity) 그리고 노동 없는 부(Wealth without Work)가 가져올 폐해를 사회악으로 규정하였다.

냉정한 자본주의는 수많은 패배자를 양산하는 괴물로 전락한다.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자유시장 체제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양극화하는 데 박차를 가한다. 젊음의 계급장이라 여겨졌던 꿈은 어느덧 사라지고 있다. 채 꽃도 피어 보기 전에 떨어져 버린 우리의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조국의 미래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하면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경쟁사회 가운데서 거룩한 자긍심을 가지고 살 수 있을까? 이러한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다양한 대답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목양자의 심정으로 이렇게 답하고 싶다.

첫째, 사람은 인생의 주인을 알 때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진화론과 창조론은 양극으로 대립한다. 진화론을 택할 때 창조주의 존재는 설 자리가 없어진다. 창조주를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실상은 인간이 그 주인을 상실한 것이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고향이 있다. 고향을 상실할 때 사람은 방황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원한 고향인 창조주 하나님을 잃어버리게 될 때 그 사람은 본래적으로 방황할 수밖에 없다. 거창하게 창조주 하나님을 논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화목한 가정의 내력을 살펴보면 이 문제를 이해할 수 있다. 경제가 넉넉하지 않아도 부모와 자식 간의 끈끈한 유대가 있으면 웬만한 어려움은 극복할 수 있다. 사랑의 고리가 끊어지면 인간세계는 삭막함으로 채워지게 된다. 왜 자라나는 세대에게 우리나라 역사 교육을 강조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뿌리를 잘 알아야만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를 선명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궁극적인 주인을 아는 것이야말로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가장 놀라운 축복이다.

둘째, 삶의 목적이 분명해야 허무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다.

이 세상에 목적 없는 사람과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젊음의 목적이 있을 것이다. 목적을 잃어버린 젊은이는 순례자의 길을 벗어나게 된다. 방황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 하늘에 날아다니는 산새 한 마리도 그 울음과 노래에는 목적이 깃들여 있다. 나그네 발길이 닿지 않는 저 산속 한적한 곳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야생화에도 목적이 부여되어 있다. 삶의 분명한 목적은 그 사람을 받쳐주는 버팀목이 된다. 특히 고난의 때라면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는가. 삶의 목적이 선명하지 않은 사람이 고난을 승리하는 예를 본 적 있는가. 그대는 인생의 로드맵을 손에 쥐고 있는가?

셋째, 좋은 삶의 동반자와의 축복된 만남은 허무주의를 이겨내는 용기를 준다.

요즈음 우리에게 설득력 있게 들리는 말 중의 하나가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 그러나 끝까지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라는 말이다. 의미 있는 진술이다. 필자는 “즐겁고 의미 있게 가려면 함께 가라”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지구촌 위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나그네 여정을 출발한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의미 있게 사는 방법은 좋은 사람과의 동반이다. 마음 맞는 사람과의 동행이다. 훌륭한 멘토를 만났기에 훌륭하게 업적을 남기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와 반대로 진정한 동반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도중하차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부모도 형제도 영원히 함께 있을 수는 없다. 대문호였으며 사상가였던 ‘톨스토이’는 삶의 의미를 간파하였기에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이다. 당신이 현재 만나고 있는 사람이다.” 마음 맞는 삶의 동반자와 만나는 것은 인생의 보석을 손에 쥔 것이나 다름없다.

죽은 존재에게는 허무를 논할 이유가 없다. 살아 있기에 우리에게는 허무와의 투쟁을 예외 없이 감당해야 한다. 기성세대이든지 신세대이든지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는 허무주의를 깨뜨리고 삶의 새로운 관계설정을 통하여 미래를 생명의 약동함으로 펼쳐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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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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