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노론-소론 활발한 붕당정치… 식민사관국사교육 ‘당쟁’ 폄하

윤증 초상화
윤증 초상화
논산시 노성면에는 충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인 명재(明齋) 윤증(尹拯) 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명재 윤증은 조선 유학사에서 예학을 정립한 대학자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가 죽은 뒤 조문 인사가 무려 2300여명에 달했다하니 당대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숙종실록’은 윤증을 스승을 배신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숙종실록 편찬을 주도했던 노론계 인사들이 윤증을 왜곡한 탓이다. 윤증은 노론의 반대편에 있던 소론의 영수였다.

조선 유교의 주류였던 기호유교는 바로 윤증의 손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노소 분당은 조선의 지배 철학인 주자학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시작됐다. 서인을 대표하는 우암 송시열은 주자학을 신봉하고 실천하고자 했지만 윤증을 비롯한 일부 소장파 학자들이 비판을 제기하며 분열이 생겼다.

송시열과 윤증은 사제지간이다. 윤증은 송시열의 문하 중에서도 백미였다. 명문가의 자제이면서 대학자를 사사한 윤증의 앞길은 불행하게도 순탄치 않았다. 어린 시절의 병자호란과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와 스승 송시열의 대립은 인생에 큰 시련을 주었다.

온 가족이 피난한 강화도마저 청나라 군대에 함락 당하면서 어린 윤증은 선비들의 순절과 항쟁을 지켜봤다. 윤증의 어머니 공주이씨도 적에게 수모를 당하느니 자결하겠다며 목을 맸고, 아버지 윤선거는 부친을 위해 성을 탈출했다. 어머니의 시신은 어린 윤증이 수습했지만 아버지 윤선거는 이 사건을 계기로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채 금산(錦山)에 은거했다.

병자호란 뒤 당시 남인이던 백호 윤휴가 주자학을 비판하는 일이 벌어졌다. 송시열은 격노하며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배척한다. 반면 윤선거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며 주자학의 경직성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송시열은 윤선거까지 강하게 비판했고, 불편한 관계가 시작된다. 송시열은 훗날 윤선거가 죽은 뒤 묘비명에 그 불편한 마음을 그대로 나타냈고, 특히 강화도에서의 일을 비난했다. 윤증이 수차례 다시 써줄 것을 부탁했지만 변함이 없었다. 마침내 윤증은 송시열의 태도를 지적하는 편지를 쓴다. 편지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송시열은 윤증과 사제(師弟)의 의를 끊는다.

윤증은 일련의 사건 속에서 정치적으로 서인 내부에 존재하던 강경파와 온건파 중 온건을 주장한 소론의 영수로 추대된다. 강경파인 송시열 측의 노론과 치열한 당쟁의 서막도 열린다.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되는 사건을 역사적으로 ‘회니시비(懷尼是非)’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두 학자가 거주했던 회덕(懷德-송시열)과 니성(尼城, 노성-윤증)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이후로 노론과 소론은 경종(景宗)·영조(英祖)·정조(正祖) 대로 이어지며 격렬히 대립했으나,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노론이 승리하면서 노론 일당의 전제정치 체제로 굳어졌다

명재 윤증은 대사헌·이조참판·이조판서·우의정을 임명 받았지만 한 번도 벼슬길에 나아간 적이 없다. 하지만 그의 정견은 정치적 중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상소로 피력됐고, 정치당국자나 학인과의 왕복서를 통해 나타났다. 그가 죽은 후 숙종은 정승 벼슬까지 내리고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것을 슬퍼하며 조사를 써서 추모했다.

조선조 붕당정치는 일제강점기 식민주의 사학자들에 의해 ‘당쟁’으로 폄하됐다. 식민사관에 입각한 국사 교육은 광복 이후까지 이어져 여전히 그런 시각이 남아있다. 인간의 역사는 대립과 투쟁 속에서 발전된다. 조선 중기 이후 노소 갈등은 병자호란 이후 야기된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른 숭명의리(송시열)와 대청실리외교문제(윤증)의 대립이었고, 호란 이후의 사회변동과 경제적 곤란은 주자학적 의리론과 명분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역사적 명제를 제기시켰다. 윤증은 어진 스승을 배반했다는 패륜으로 지목받았지만, 그를 따르던 소론 진보세력들은 그의 사상을 꾸준히 전승 발전시키면서 노론 일당 전제체제 하의 건전한 비판 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

권성하 기자 nis-1@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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