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제주 올레길을 다녀왔다. 끝없이 이어진 그 길에는 예상보다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차림새로 보아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들이 꽤 많았는데, 그들이 비행기까지 타고 와서는 겨우 이런 길을 찾아온다는 것이 뜻밖이었다. 그러나 요즘엔 거의 사라져 버린, 판타지의 세계에서나 볼 수 있을 우리의 옛 고향 길 같은 정경이라면 그곳을 찾는 데 굳이 출신과 노소를 가릴 필요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을 거닐며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동화책이나 빛바랜 사진에서 보았을 것 같은 그 길을 도시의 젊은이들이 찾는 것은 아마 판타지를 동경하는 인간의 성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비록 고향에 대한 추억이 없다 하더라도 온통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의 풍경에 답답해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고, 때 묻지 않고 원시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환상적이기까지 한 풍경은 큰 위안이 아닐 수 없으리라. 그것이 어릴 적 살던 고향 길과 닮아서이건, 즐겨 보던 동화책의 풍경과 같아서이건, 그곳을 가는 이유는 매한가지, 현실과 다른 것에 대한 동경이리라.

판타지 세계에 대한 동경은 어쩌면 인간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언제나 너무 벅찬 딱딱한 현실 속에서만 살다 보면 현실과 비슷하지만 한두 가지가 결정적으로 다른 어떤 세계를 동경하게 마련이다. ‘어느 날 소녀가 토끼 굴에 떨어졌는데, 그 굴 안의 토끼 가족이 그 소녀에게 딸기를 먹인다’는 그런 세계 말이다. 이것은 ‘해리 포터’의 작가 J. K. 로울링이 어렸을 적에 자신의 여동생에게 들려주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이다. 65개 언어로 번역돼 가장 빨리, 가장 많이 팔리면서 출판 및 문학 사상 가장 많은 신기록을 세운 ‘해리 포터’ 역시 판타지 소설이다. 이 책이 어른들에게도 인기가 있는 이유에 대해 작가는 “사실 이 이야기는 나 자신을 위해 쓴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은 어른이든 아이든 가끔씩은 이런 세계로 들어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는 시골에도 그 옛날의 시골길은 보기 힘들게 되었다. 요즘의 시골길은 거의 시멘트로 포장이 되어 있고, 길가의 논밭도 주변과는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비닐하우스나 축사 같은 것들이 점령한 지 오래다. 우리가 어렸을 적 다니던 그 길은 이제 제주도 아니면 어느 산골 오지에나 가야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고향엔 우리의 추억이 서려 있던 것들이 거의 다 사라졌다. 객지로 떠나는 남편이나 자식을 배웅하면서 우리의 어머니들이 기대고 서서 손 흔들던 산모퉁이의 그 초라하던 참나무, ‘구루마’ 바퀴 자국 사이에서 자라던 풀꽃들, 오디가 주렁주렁 열리던 마당가의 뽕나무, 이런 것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사라졌다. 이제 고향은 볼 일이 있어 방문하는 곳이지 이런 것들을 찾아가는 마음속 판타지의 무대는 아니다.

퀼러-카우치의 단편소설 ‘버스’가 생각난다. 65년 전 부모를 여의고 어린 나이에 정든 고향을 떠나 줄곧 런던에서 살아온 주인공. 어느 날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것임이 틀림없는 한 소년이 조그만 보퉁이를 들고 버스에 올라오는 것을 보는데, 그 소년의 모습이 영락없는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이었다. 그의 눈물을 핑 돌게 만든 것은 그 소년의 보따리에 매달려 있는, 소년의 어머니가 묶어 놓았을, 시골집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들로 만든 작은 꽃다발 때문이었다.

그걸 보는 순간, 주인공의 눈에는 65년 전 생전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던 때를 떠올리며 눈물이 고인다. 그때 소년은 막 출발하려던 마차에서 돌아서서 마당가에 있던 장미와 라일락과 작별하고, 외양간에 있는 소하고는 일일이 키스를 하고, 처마 밑의 제비집에까지 작별을 고한다. 그렇게 떠난 고향이건만 그 뒤로 그는 감히 한 번도 고향을 가지 않았는데, 이제는 모두 변해 자신이 살던 곳조차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우리는 수없이 많은 것들을 버렸다. 택지개발을 하기 위해서, 길을 내기 위해서, 또는 하천을 정비한답시고 모두 베어내고 파냈다. 집이 헐리고 불도저가 검은 흙을 걷어내자 새 흙이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 사람이 수십 년 살던 집터의 흔적이 어떻게 저렇게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는지 그 덧없음에 소름이 돋았다. 그 집에서도 언제부턴가 한 남녀가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키웠을 것이고, 그들이 장성하여 객지로 흩어져서는 또 다른 가정을 꾸려 살면서 명절이나 부모님의 생신날이면 어김없이 찾아들던 곳 아니던가.

인구가 늘고 도시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 개발이 불가피하겠지만, 한 그루의 나무, 한 포기의 풀꽃도 어느 누군가에게는 수십 년 만에 돌아와 부여잡고 눈물 흘릴 만한 것 아니겠는가?

-이환태 목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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