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을 꽁꽁 얼게 했던 혹한의 추위 속에서 따뜻한 봄날이 다시 올 것 같지 않은 날씨 속에서도,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의 마음에 어김없이 봄이 찾아오고 있다. 봄은 우리에게 새로운 싹을 틔우는 경이로움으로 우리의 마음에도 새로움을 주고 있다. 긴 겨울의 차디찬 언 땅을 뚫고 올라오는 파릇파릇한 새싹과, 수줍게 얼굴을 내미는 매화를 비롯하여 갖가지 꽃망울의 신비함 속에서 자신을 찾아 본다.

나는 누가 만들었을까?

나는 어렸을 때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나의 이 모습을 누가 만들었을까?’ 그 당시 어린 나이의 우리들은 자기의 모든 현 주소는 부모님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하여 마음에 들지 않는 부족한 부분에 대하여 부모님을 원망하곤 했었다.

나는 형제가 많은 집에서 자랐다. 아들도 딸도 많은 집이다. 내 나이 9살 무렵의 어느 날 아침에 아버님께서 “너의 어머니 어제 저녁에 딸 낳았다”고 하시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시는 아버님의 표정이 별로 기뻐하지 않는 것같이 느껴졌다. ‘딸이 태어나서 섭섭하신가?’ ‘아들이 있는 집인데 왜 싫어하시지?’ 하는 의문이 생겼다. 내가 살던 동네의 어느 집은 8공주집이었다. 그 당시 딸만 여덟을 낳은 집은 아들이 없기 때문에 딸을 낳으면 섭섭하겠지만 우리 집은 아들이 많이 있는데… 나도 딸이어서 아버님의 표정이 안 잊혀지고 있는가?

몇 년 후 막내 동생이 태어난 날의 아버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아침 일찍 어머님과 병원에 가시었다. 정오경에 오신 아버님은 아들 낳았다고 기쁘신 표정으로 오셨다. 늦둥이 아들을 얻으시고 기뻐하시는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다. 아들, 딸로 태어나는 것은 부모의 바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내가 딸로 태어난 것은 누구 때문인가? 그러면 누가 아들로, 딸로 태어나게 하는 것인가? 아들이 좋고 딸은 나쁘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아버님은 생활에서나, 교육 등 모든 면에서 아들, 딸에 평등하셨다. 지금 돌이켜 보면 당시 ‘여필종부’의 남·여불평등(?) 사회에서 ‘딸’들이 살아갈 것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지극한 사랑에서’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결혼한 친구가 임신하고 두렵다고 한다. 다른 친구들이 결혼하여 낳은 아이를 보고 ‘예쁘다 밉다’ 하고 말들을 하는데, 자기 아이는 어떤 모습일까 겁이 난다고 한다. 이 세상 모든 부모는 예쁘고 착하고 공부 잘하고, 모든 면에 다 갖춘 아이를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태어나는 아이는 천차만별이다.

옆집 언니는 얼굴은 예쁘고, 키는 작고 목이 보통 사람보다 짧았다. 그 언니는 항상 자기 어머님께 불평하였다. 어머니를 닮아 목이 짧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 언니는 결혼하여 첫딸을 낳았는데, 본인의 키와 목을 닮은 딸을 낳았다. 더 이상 친정어머니를 원망할 수 없게 되었다. 현재 우리들의 모습은 부모의 탓이 아님이 틀림없다. 그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

자라면서 알게 되었다. 어느 부모도 미운 자녀, 지능이 모자란 자녀, 사회에 적응 못 하는 자녀, 게으른 자녀, 기능과 능력이 부족한 자녀를 두고 싶은 사람은 없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자녀들에게 춥고 배고프게 키우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원불교에 다니시는 어머님께서 ‘모든 것은 자기가 지은 대로 받는다’고 하시었는데, 지금 현재의 나는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만든 것이라는 말씀이 옳은 것 같다. 지금 현재의 여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 세상 많은 부모와 가정이 있는데 더 좋은 부모 더 좋은 가정에 태어나면 될 것 아닌가? 원불교의 교리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영생을 통하여 나는 내가 만든 것’이라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나’를 만든 것이 ‘나’일진대 내가 부족할수록 부모에게 형제에게 미안한 일이다. 부족한 내가 이 집에 와서 부모에게 자랑스러운 자녀가 못 된 것도 내 탓이니, 부모에게 미안하고, 형제에게도 자랑스러운 여동생, 누나, 언니가 못 됨에 미안한 생각이 들게 되었다.

나의 조물주가 나라는 확신을 얻고 나는 원망이 없어졌다. 미움도 없애려고 노력했다. ‘나의 인생은 나의 것’, ‘나의 조물주는 나’라는 생각은, 나의 생애에 대한 생각도 깊어지게 하였으며,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려는 생각으로 살게 되었다.

어렸을 적에 돌에 넘어지거나, 남의 잘못에 의해 상처를 입게 되면, 소리를 크게 내며 울고, 나의 잘못으로 상처를 입게 되면 안 아픈 척했던 기억이 있다.

재색(財色) 명리(名利) 간에 부족한 것은 누구도 원망할 일이 아니다. ‘나의 조물주가 나’라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내가 나를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백두산 상봉에 있는 작은 풀꽃은 거센 바람, 폭풍우 속에서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원리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기의 부족한 여건을 극복하고 강인하게 성장할 수 있는 근본적 원리와 실질적인 방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참 삶의 원리를 알고 살아가야 한다.

지금의 ‘나’도 내가 만들었고, 앞으로의 ‘나’도 어느 누구의 탓이 아니라, ‘내가 나의 조물주’라는 것은 나의 삶을 책임 있게 잘 살 수 있는 원리이다.

원불교 대전충남 김혜봉 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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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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