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식 대한건축사협회 충남도회 회장

종이는 천 년 가고 비단은 오백 년 간다는 ‘지천년견오백’이란 말처럼 한지가 갖고 있는 고유의 특성과 친환경성은 세계 최고의 자원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중국 황제에 관한 기록은 모두 한지를 썼다고 한다. 그렇기에 지금도 고려시대의 책들을 인사동에서 펼쳐볼 수 있으나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성경은 지질 때문에 평소에는 암실에 보관하고 있다 한다.

들기름 먹인 한지는 비닐보다 더 질기고 햇빛 투과율이 45%에 이르기에 선조들은 유럽보다 170년이나 앞서 온실을 만들었다. 한지는 옻칠하여 여러 겹 겹치면 화살도 뚫지 못하는 강함이 있어 갑옷의 일부분으로 사용하였다. 필자의 어린 시절만 하여도 한지로 만들어 썼던 반짇고리 등이 요즈음은 공예로 부활하고 심지어 의복으로까지 만들어 입고 있다.

이렇듯 한지의 용도가 다양하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정겹게 다가오는 것은 창호지문일 것이다. 격자무늬, 세살무늬, 완자살무늬, 아자살무늬 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무늬를 나무창살로 된 문에 한지를 발라 채광을 고려하였다.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에 묵은 창호지를 제거하고 새 창호지를 바르게 되는데 문고리 주변의 창호지 위에 예쁜 꽃잎을 놓고 다시 창호지를 작게 잘라 덧대어 붙이면 한 폭의 작은 꽃액자가 만들어진다. 창호지 사이에 끼인 꽃잎이라 더 아련하고 어슴푸레 보여서 운치를 더한다. 또한 방안에 앉아서 밖의 마당을 내다볼 수 있는 작은 유리를 덧대어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가 있었다.

창호지는 투명유리보다 한지를 통해 비쳐 들어오는 햇살은 강렬하지 않고 은은하여 방안 분위기를 한층 차분하고 아늑하게 만들어준다. 한지는 채광뿐만 아니라 통풍에도 유리하여 미세한 구멍으로 환기와 온·습도까지 조절한다. 뿐만 아니라 열전도율이 낮아 단열효과도 커서 창호지 이중창은 웬만한 페어글라스 창보다 열효율이 높아 창호지문은 가히 환경친화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매년 문 바르기를 해야 하는 귀찮음 때문인지 창호지 사용이 점점 사라지고 있고, 경복궁 내 궁궐도 자원봉사이기는 하나 외국인이 창호지를 바르기도 하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우리의 전통가옥도 내부개량을 하면서 문살은 전통방식임에도 창호지 대신 한지로 보이는 이미테이션 플라스틱을 붙이는 집들이 늘고 있다.

“어디서 솰솰 소란히 들려오는 소리 있기에 바람 소리인가 했으나, 가만히 들어보면 바람소리도 아니요, 물소린가 했더니 물소리만도 아니요, 나뭇잎 갈리는 소리와 함께 어울린 교향악인 듯싶거니와 어쩌면 곤히 잠든 산의 호흡인지도 모를 일이다. 뜰을 어정어정 거닐다 보니 여관집 아기씨는 등잔 아래에 외로이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무슨 책일까? 밤 깊은 줄조차 모르고 골똘히 읽는 품이, 춘향이 태형 맞으며 백으로 아뢰는 대목인 것도 같고, 누명쓴 장화가 자결을 각오하고 원한을 하늘에 고축하는 대목인 것도 같고, 시베리아로 정배가는 카추샤의 뒤를 네프 백작이 쫓아가는 대목인 것도 같고 궁금한 판에 제멋대로 상상해 보는 동안에 산속의 밤은 처량히 깊어갔다.”

정비석은 금강산 기행문 ‘산정무한’에서 창호지문에 비친 독서하는 아가씨의 그림자를 보며 이처럼 상상의 나래를 폈다.

유리창은 내부의 실체가 너무 선명하게 보이고 커튼은 너무 선명치 않다. 가장 아름다움의 실루엣을 보여주는 창호지문을 통해 보는 다듬이질하는 그림자 영상과 리드미컬한 다듬이 소리는 세계인을 매료케 하는 한국의 멋이다.

깊어가는 겨울, 창호지에 비친 독서하는 그림자가 아름다운 계절이다. 이 풍진세상 잊고 잠시 고즈넉한 산사에서 독서삼매에 빠져봄은 어떠할까?

신우식<대한건축사협회 충남도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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