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가약(百年佳約), 세상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말도 드물 것이다. 젊은 남녀가 인연을 맺어 한평생 같이 살 것을 다짐하는 성스런 언약. 결혼은 인생 최고의 대사(大事)가 아닐 수 없다. 평생의 반려(伴侶)됨을 서약하는 결혼식 행사는 그래서 당사자들의 사랑이 최우선 전제이며 가족과 친지들의 진심 어린 축복이 있어야겠다.

그런데 결혼식을 둘러싸고 정작 주변에서 더 설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영국 왕실의 떠들썩한 결혼식 준비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4월 29일 치러질 영국 왕위 계승 서열 2위 윌리엄 왕자와 동갑내기 약혼녀 케이트 미들턴 간 ‘세기의 결혼식’에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신부는 과연 어떤 웨딩드레스를 입을까, 그 드레스는 누가 디자인한 것일까, 예물은? 신혼여행지는?

결혼식에 편승해 온갖 상혼이 판치는 현실을 보면서 입맛이 쓰다. 왕실 저택과 결혼식이 열리는 웨스트민스터 성당, 왕실에서 사용하는 구두·보석류를 파는 상점들을 방문하는 관광 상품을 비롯해 심지어 ‘기념 콘돔’까지 등장했다. 이들의 결혼식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캐나다 토론토에서는 시민들이 결혼식 중계방송을 시청할 수 있도록 술집의 영업시간까지 연장할 예정이다. 인간의 얄팍한 상술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이들의 결혼식 행사로 인해 자그마치 6억2000만 파운드(약 1조1100억 원)의 경제적 효과가 있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일본의 대지진과 중동의 민주화 운동 등으로 엄청난 희생자가 속출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한가한 소리를 늘어놔도 되는지, 세상은 정말 너무도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무지 하는 일이라고는 없이 수시로 염문스캔들이나 일으키는 영국 왕실이 요즘 시대에도 존재한다는 사실.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외도와 죽음 등 왕실 사람들의 잇단 일탈행위는 국민들이 조금도 본받을 것이 없다. 최근에는 윌리엄 왕자의 삼촌이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차남인 앤드루(51) 왕자가 리비아 독재정권 및 미성년 소녀와의 성 추문을 일으킨 미국 억만장자와 친분관계를 맺어온 사실이 드러나 또 구설이다.

‘군림하되 통치는 하지 않는’ 여왕이 세계를 돌며 핸드백과 모자 패션쇼를 벌이는 모습은 가관이다. 아무리 전통과 관습을 중시한다지만 요즘 같은 개명천지(開明天地)에 웬 여왕인가. 1952년 즉위해 무려 60여 년을 군림하고 있는 엘리자베스 여왕은 세계 최장의 독재자다. 그녀가 영국을 비롯해 캐나다 등 16개국의 국가원수란 사실이 우스꽝스럽다.

왕실은 화려한 권위와 명예를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쓴다. 영국의 최대 지주로 버킹엄궁, 윈저성, 홀리루드궁 등 왕실 궁전에는 6000여 개의 방이 있다. 왕실을 위해 65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며 왕실 유지비가 연간 최소 2억 달러, 여왕의 공개된 재산만 6억 달러에 달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사회적 책무)란 말이 무색하다.

입헌군주제가 시대착오적이라는 지적이 높은데도 영국 왕실은 아직 건재하다. 그들이 기여하는 것은 오로지 관광객들이 열병식 장면을 사진 찍도록 해주는 모델 역할밖엔 없다. 시대가 바뀌었으나 아직도 국민 다수는 왕실의 유지를 바란다. 그러나 점증하는 수의 국민이 왕실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영국군주제는 이미 퇴색하고 있다.

이런 왕실의 결혼식에 세계가 들썩이는 모습이 천박하다. 특히 경제도 어려운 상황에서 이런 행태는 서민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심화시키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세계의 이목을 받으며 출발하는 신혼부부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겉으로만 화려한 사랑이 얼마나 지속될지 벌써 걱정이다. 결혼과 결별을 어린아이 장난하듯 하는 숱한 연예스타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화려한 웨딩드레스가 언제 눈물로 얼룩질지 모른다.

어느 사회나 상류층의 요란한 결혼식이 질타받는 경우가 숱하다. 수년 전, 한국 인천의 어느 교육감은 아들 결혼식 때 관내 수백 개 학교 교장·교감과 공무원, 유관단체 인사들에게 수천 장의 청첩장을 돌리고 예식 진행에 공무원까지 동원해 물의를 빚었다. 지도층일수록 검소하고 절제된 자세가 필요한데 현실은 정반대다. 현직에 있을 때 한몫 단단히 챙기자는 심리가 만연해 있다.

사랑하는 님과 함께 야반도주(夜半逃走)라도 할 각오가 돼 있는 ‘목숨 거는 사랑’이라면 단칸 사글세방에 살더라도 사랑이 샘솟듯 할 것이다. 비가 새는 작은 방에 새우잠을 잔데도/고운 님 함께라면 즐거웁지 않더냐./오손도손 속삭이는 밤이 있는 한/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대중가요 ‘사노라면’ 중)

이용우(재 캐나다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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