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

과학의 역사는 자연과의 ‘쟁투(爭鬪)’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이 없거나 보편적이지 않던 시절, 자연현상은 신의 영역이었다. 인간이 그것을 이해하거나 통제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천재지변은 신의 노여움이었고, 인간은 그 노여움이 가라앉기를 속절없이 기다리는 방법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천재지변을 포함한 자연현상을 인간의 영역으로 가져오기 위한 시도가 바로 과학이다.

인류는 과학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영역을 하나씩 ‘정복’하고, 자연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일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천재지변의 가공할 위력을 원천적으로 제어할 수는 없지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다양한 연구결과가 나왔고, 이 가운데 상당수는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여전히 미지의 영역은 남아 있지만, 자연현상 대부분의 원인은 밝혀진 상태이다.

이번에 발생한 일본의 ‘3·11 동북지역대지진’은 과학과 자연의 쟁투에서 압도적 승자는 여전히 자연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줬다. 일본에서 이런 대재앙이 발생한 것에 우리가 더 큰 충격을 받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이 명실상부 ‘과학 선진국’이기 때문이다. 천재지변과 같은 자연재해는 물론 인재로부터 시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할 수 있는 시스템이 세계적으로 잘 갖춰져 있는 일본이지만 진도 9의 지진과 쓰나미에는 속수무책이다. 더구나 원자력발전소까지 작동이 멈추고 파괴돼 방사능까지 누출되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 우리의 왜소함을 돌아보게 한다.

3·11 대지진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땅이 흔들린 뒤 물과 불이 덮쳤고 이제는 방사능 공포까지 엄습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이 빠지고 불이 꺼지자 수많은 시체들이 나오고 있다. 사망자 수는 공식 집계도 어려운 실정이고 현재까지 수천 명이지만 이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쓰나미가 덮친 일본의 동북부 해안에서 연락이 두절된 실종자가 1만 명이 넘는 지역만 4곳에 달한다고 한다. 도시 전체가 불바다로 변했던 미야기현의 게센누마시에서는 주민 7만5000명 가운데 1만5000명만 안전하게 대피했을 뿐이다. 도로와 통신이 끊겨 구조대나 자위대가 아직 접근조차 못 하는 지역도 상당수에 달한다. 일본 당국 역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참사”라고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원전의 외벽이 폭발하면서 ‘방사능 공포’까지 덮쳤다. 원자로 내 핵연료봉 일부가 액체처럼 녹아내리는 ‘노심(爐心) 용해’ 현상이 발생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액체로 변한 핵연료가 원자로를 뚫고 흘러나오게 되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다. 피폭자 규모도 최대 190명에 달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온 데 이어 일본 당국은 이미 인근 지역의 주민 20만 명을 대피시킨 상태다.

이런 일본의 대참사를 우리나라 국민은 진정으로 애도하며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더 이상의 대규모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도 한결같다.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소회도 비슷하다. 다만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과학의 힘이 자연의 힘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오히려 과학계가 앞으로 할 일이 너무 많다는 책임감도 느낀다. 과학으로 자연을 이기고자 하는 게 아니라, 자연의 순리를 따르면서도 자연을 더 깊이 관찰하고, 이해하고, 조변석개하는 자연의 현상을 분석하는 것은 인류의 삶을 위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과학과 자연, 그리고 천재지변을 생각하며 ‘잠 못 이루는 행성(어네스트 지브로스키·2002)’의 한 대목을 떠올린다. “과학을 한다는 것은 어두운 골목길을 운에 맡기고 달려가는 것과 같다. 쓸모없는 돌멩이만 발견할 수 있다. (중략) 과학은 항상 무지로부터 시작된다. 항상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노리며, 어떤 방식으로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자연재해를 우리는 이해하고자 한다. 미래의 대재난을 예측하고 완화시키는 일에 대해 과학자들에게 어느 정도까지 기대를 하는 것이 합리적인지 묻는 것은 정당하다.”

우리에게 누군가 일본 지진을 보며 현대 과학이 대재난을 어느 정도까지 예측할 수 있는지 물어 올지 모른다. 단언하긴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완전히 정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예측할 수 없는 대재난으로부터 인간의 생명과 안전을 최대한 지켜줄 수 있는 것도 결국은 과학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번 일본 대지진을 보면서 아마도 모든 과학자들은 이런 비슷한 의무감을 느꼈을 것이다. 다시 한 번 이번 대지진으로 인한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조속한 복구를 소망한다.

김명수<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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