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엔디컷 우송대학교 총장

얼마 전, 나는 대전일보의 남재두 회장과 사석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연배가 비슷한 우리는 함께 앉아 차를 마시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한국 전쟁과 그 당시 힘들었던 상황에 대하여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실제로 지난 해는 대전일보가 발간 60주년을 맞은 매우 뜻 깊은 해였고 대전일보의 60년 세월을 돌이켜 보며 과거 속에서 멀게만 느껴지는, 그러나 한편으로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나는 우리의 어린 시절과 젊은 날에 대한 우리의 이야기는 끝날 줄을 몰랐다. 물론, 미국 오하이오주에 살던 14살 소년으로서의 나의 기억은 그 당시 한반도에서 겪고 있던 전쟁과 폭격을 겪은 남회장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평범하기 그지없다. 남회장은 한국전쟁과 부산으로의 피란, 그리고 다시 대전으로 돌아오기까지, 그리고 어떤 형태의 신문으로든 이 지역의 주민들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해 했던 노력까지. 마치 어제의 일인 듯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 역시도 한편으로는 지구의 저 반대편 오하이오에서 전쟁의 여파를 겪고 있었다. 한국의 전쟁은 미국의 평범한 중산층에도 영향을 끼쳤다. 1950년 6월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때, 평화롭던 우리 가정에서도 누나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집안이 시끄러워졌다. 누나는 평생을 꿈꿔 왔던 멋진 남자와 결혼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누나가 평생 꿈꾸던 멋진 남자는 우리 부모님이 보시기엔 그렇지 못한 듯하였다. 누나는 자신의 생일날인 1950년 6월 23일에 결혼을 하였다. 이 날은 바로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하루 전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누나의 결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었고 누나 역시 부모님께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러한 집안의 상황은 아버지가 미국 풀브라이트(Fulbright) 교환교사로 영국에 파견을 나갈 기회가 생기면서 더욱 복잡해져만 갔다. 아버지가 뽑힌 영국 런던에서 1년간 교사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는 그 당시 매우 흔치 않은 기회였다.

한국에서 남회장과 그 가족이 한국전쟁의 고통을 겪고 있을 때 나와 우리 가족들 역시도 일생일대의 결정을 앞두고 고민에 빠졌다. 어느 날 우리 가족은 모두 부엌의 식탁에 둘러 앉았다. 아버지께서는 가족회의를 통해 영국으로 가실지 아니면 미국에 계실지 결정하자고 하셨다. 나는 평생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아들이다. 아버지는 항상 민주적이셨고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셨다. 나 역시도 아들과 딸에게 그리고 내가 가르치는 모든 학생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아버지요, 선생님이 되고자 한평생 노력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항상 나를 앞서가셨다. 1950년 전형적인 미국가정에서는 아버지의 권한이란 실로 대단했던 때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가족회의를 통해 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자 하셨다. 그 당시, 아버지가 영국으로 가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가족의 의견을 끝까지 존중하고자 하셨던 모습은 내겐 평생을 두고 귀감이 되고 있다.

나와 남회장보다 젊은 많은 독자들에게 나는 한국전쟁의 발발이 많은 유럽국가나 미국에 어떻게 비쳐졌는지 말해 주고 싶다. 지금은 믿기 어려울 수도 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드디어 세계 제3차 대전이 시작된다고 생각하였다. 북한의 도발과 함께 옛 소련이 유럽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측하였고 이는 곧 세계가 다시 전쟁에 휩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우리 가족이 영국행을 결정해야 했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다. 학교에서는 친구들이 내게 말했다. “존, 만약 너와 너의 가족이 영국으로 간다면 전쟁 때문에 영국에 갇히게 될거야. 그리고 결코 미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라.”

교사의 인생에서 한 번 올까 말까한 기회와 영광을 아버지와 우리가족은 잡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영국으로 떠났고 나는 200명의 영국 소년들 사이에서 유일한 미국인으로서 1년간 학교를 다녔다.

나는 이런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과 경험을 남회장에게 들려 주었고 남회장 역시 그 당시 한반도의 상황과 자신이 전쟁을 통해 겪은 이야기를 나에게 해 주었다. 남회장과 나는 이렇게 옛 추억을 되새기며 친구가 되었다. 우리의 추억과 경험을 나누는 동안 우리는 오늘날 한국이 얼마나 발전해 왔는지, 한국인들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 공감하여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감사하게 되었다. 실제로, 내가 미국 공군으로서 한국에 처음 방문하던 1959년도에는 서울에서 용산까지의 길이 포장되지 않았고 주위의 산 역시도 민둥산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출장 때문에 용산역에 가면 내가 같은 용산에 있다고 생각하기도 어려울 만큼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한국인 독자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이룩한 이 모든 것에 대하여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듯하다. 이는 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생각일 것이다. 나와 내 아내는 여러분들이 이룩한 이 멋진 나라에서 하루 하루 감사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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