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고대 백제문화의 진수, 공주-부여 역사유적지구

선사시대부터 조선조에 이르는 장구한 대한민국 역사 속에 남아있는 유적 유물 가운데 유독 백제 유적지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지 못했다는 본보 보도(1월11일,12일,13일,14일,20일,21일,24일,25일,26일,27일31일,2월8일,9일자) 이후 공주·부여 역사유적지구가 지난 8일 문화재청 세계유산위원회로부터 세계유산 ‘우선 등재’ 추진 목록에 선정되는 결실을 맺었다.

공주·부여 역사유적지구는 앞으로 2-3년간의 준비 기간을 걸쳐 본격적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경쟁에 한국 대표로 출전하게 된다.

이번 우선 등재 선정은 백제의 역사·문화·사회·경제·정치·외교 등 전반에 대한 진정한 평가의 기회를 잡았다는데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십수년간 ‘잠재 목록’의 꼬리표를 떼지 못했던 무령왕릉의 설움(?)을 발굴 40주년 만에 해소하는 경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계문화유산 본 등재를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첫걸음은 지피지기(知彼知己)다. 그중에서도 공주·부여 역사유적지구의 면면을 제대로 아는게 중요하다. 세계문화유산 등재에는 ‘진정성’이 으뜸가는 평가 잣대지만 공주와 부여 곳곳에 산재된 유적들의 이름과 역사성 등을 하나씩 손꼽으며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충남도와 관련 부서에서 전국민 캠페인을 펼쳐서라도 홍보해야 할 의무인 셈이다.

소멸된 한 문명을 상징하는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사례는 흔치 않은 점도 감안해야 한다. 고대 왕국이 도읍지로서 갖춰야 할 요소인 왕성, 종교시설, 고분군 등 확인할 수 있는 유적지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등재 목록에 오른 공주·부여역사지구를 하나씩 살펴본다.

◇9개 지구 19개 유적=공주와 부여는 200여년간 도읍지로 찬란한 중기 백제문화가 꽃 피운 곳이다. 고구려 장수왕에게 수도 위례성을 빼앗긴 뒤 웅진(공주)으로 천도했고, 성왕대에 사비(부여)로 또다시 천도한 격동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사실 공주와 부여는 행정적으로는 별개지만 실제 거리는 30km 남짓해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금강을 낀 도시라는 공통점도 있다.

충남도가 무령왕릉 단독 등재 시도를 접고, 공주와 부여를 한데 묶어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나선 것은 필연인 셈이다.

세계유산등재를 위해 정리된 유적은 모두 9개 지구 19개 유적이다. 공주는 △공산성지구(공산성·옥녀봉산성) △송산리고분군지구(송산리고분군·정지산유적) △수촌리고분군지구 △곰나루지구 등 4개 지구 6개 단위 유적이 포함됐다.

부여는 △부소산성지구(부소산성·관북리유적) △정림사지지구(정림사지·쌍북리요지) △나성지구(능산리고분군·능산리사지·부여나성·청산성) △청마산성지구(청마산성·능안골고분군·용정리사지) △구드래지구(구드래일원·왕흥사지) 등 5개 지구 13개 단위 유적이다.

◇공주 4개 지구=대표적으로 웅진시대 백제 왕궁이 자리한 공산성 지구가 있다. 공산성은 조선시대까지 사용됐다. 개축이 반복되다보니 백제 토성의 양식과 조선시대 석성 약식이 혼재한다. 토성에서 석성으로 성곽의 변천사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오미아드 모스크’와 유사한 상징성을 갖는다.

송산리 고분군은 동아시아 최대의 고고학적 발견인 ‘무령왕릉’으로 더 유명하다. 한국 고대 고분군 가운데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공과 축조연대 등을 알수 있는 유적이다. 4000여점의 국보급 유물들은 백제의 찬란했던 영광과 동아시아 고대 유물 연구의 바로미터가 된다.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물론 일본서기의 내용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귀중한 곳이기도 하다.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은 벽돌을 쌓아 올린 전축분으로 중국 남조의 문화와 국제 외교의 단면을 보여준다.

수촌리고분군은 금동관과 금동신발, 중국제 자기 등 당대 최고급 유물이 쏟아져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곰나루지구는 금강, 연미산을 포함한 무령왕릉 서쪽으로 전개되는 낮은 구릉지대와 금강변 나루 일대다. 곰나루는 백제 문주왕이 천도할때 이용한 교통로다. 공주의 옛이름 ‘고마(固麻)’의 잔영이 남은 곳이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구마나리(久麻那利)라고 불렀는데 660년 나당 연합군에 협공당하던 백제를 구원하려던 왜가 백강구 전투에서 전멸하자 일본서기는 “아아 오늘로 백제의 이름도 끝이 났다. 이제는 구마나리에 있는 조상의 묘에 참배할 수 없게 됐다”며 참담한 심정을 적어 놓았다.

◇부여 5개 지구=대표적인 부소산성지구는 사비 백제의 왕궁과 사비궁이 있었던 부소산성을 비롯한 관북리 유적 일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사비성 또는 소부리성으로 기록됐다. 사비 천도 당시 왕궁 방어를 목적으로 쌓은 석성으로 백제의 성곽 변천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군창터, 영일루, 사비루, 고란사, 낙화암 등은 이 성이 군사적 목적과 지배층의 심미적 관심사를 두루 포괄하는 곳이었음을 보여준다.

나성지구는 능산리고분군과 부여 나성, 청산성 유적을 포함한 곳이다. 나성은 둘레가 84km에 달해 부여 시가지 전체를 에워쌀 정도다.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동서축이 자연지형을 이용한 특징도 갖고 있다. 평양의 나성과 함께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나성이다. 전문가들은 사비천도 이후 538년 쯤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청마산성지구는 사비도성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청마산성이 유명하다. 성벽 둘레만 9277m에 달하고, 구간에 따라 석재와 구조를 달리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책임축성제’가 도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책임축성제는 지금의 ‘건설실명제’와 비슷한 것으로 구간을 나눠 집단별로 공사를 진행하는 방식이다. 한국고대 성곽에서는 경주 남산신성이 같은 방식이다.

정림사지지구는 백제 5층 석탑이 남아있는 정림사지가 있다. 목탑이 주류였던 당시에 최초의 석탑 양식을 선보였고, 백제의 건축·예술의 변천사를 엿볼 수있다.

구드래지구는 왕흥사지와 구드래 일원이 포함됐다. 구드래는 부소산 서쪽 백마강변의 나루터 일대다. 백제어 최고 권위자인 도수희 충남대 명예교수(국어학)는 ‘구드래’의 본말이 대왕(大王)을 뜻하는 ‘근(굳)+어라’로 풀이했다. ‘굳어라’가 일본어 ‘구더라·구다라(큰 나라)’로 변했고, 우리말로는 ‘구드래’가 됐다는 것이다.

구드래 나루를 건너 울성산 남쪽 기슭에는 백제 법왕 2년(600)에 세운 왕흥사가 있다. 현재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2000년부터 발굴조사를 하고 있다. 그동안 목탑지와 금당지, 백제에서 고려시대까지 이용된 기와 가마터가 발굴됐고, 2007년 제8차 발굴조사에서는 사리공 내부에서 금제사리병, 은제사리호, 청동사리합의 3중 구조로 안치된 사리기가 출토됐다. 이때 발견된 청동사리합 동체 외면에 새겨진 글을 통해 왕흥사의 창건시기가 문헌기록과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고, 문헌 속 백제사에 대해 전반적인 재검토에 나서는 계기가 됐다.

권성하 기자 nis-1@daejonilbo.com

박병준 기자 joonzx@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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