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 배재대 총장
김영호 배재대 총장
가끔 광화문 교보문고 빌딩을 지나다 보면 아름다운 글귀가 걸려 있는 글씨 판을 보게 된다. 일명 ‘광화문 글판’이다. 요즘 글판에는 ‘눈과 얼음의 틈새를 뚫고/가장 먼저 밀어 올리는 들꽃/그게 너였으면 좋겠다’(곽효환 시인의 얼음새꽃 중에서)가 걸려 있다.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요즘, 많은 이들은 이 글귀를 보면서 다시 올 따뜻한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추위를 이겨나갈 것이다. 혹자는 수많은 시련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 해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노력해 언젠가는 주인공이 되겠다는 각오를 다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한 구절의 글귀가 얼마나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광화문 글판의 글귀들도 그동안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져줬다. 1991년부터 시작된 광화문 글판은 초창기에는 구호적인 문구를 사용했다. 그러다가 1998년 봄 고은 시인의 시에서 발췌한 ‘떠나라 낯선 곳으로/그대 하루하루의/낡은 반복으로부터’라는 감성적인 글귀가 처음 선보였다. 이를 본 한 청와대 공무원은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일을 다시 시작해 성공을 거뒀다고 한다. 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다 흔들리며 피었나니’(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라는 글귀를 본 한 청년은 방황을 접고 목표를 향해 전진하는 자극제로 삼았다는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필자도 심신이 지쳤을 때 광화문 글판 블로그(blog.naver.com/kyobogulpan)에 들어가 위안과 용기를 얻는다. ‘바람에게도 길은 있다/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느니/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2003년 가을 천상병 시인의 바람에게도 길은 있다) ‘가는 데까지 가거라/가다 막히면 앉아서 쉬거라/쉬다 보면 새로운 길이 보이리’(2005년 여름 김동규 시인의 해는 기울고)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2006년 겨울 안도현 시인의 연탄 한 장) 등을 통해 나를 되돌아보며 마음을 추스르기도 한다.

광화문 글판이 우리에게 첫선을 보인지 만 20년이 흘렀다. 한 기업이 20년간 묵묵히 해온 이 작업은 어느새 시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예술작품으로 평가받아왔다. 이제는 광화문의 아이콘을 넘어 전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광화문 글판은 2007년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밝게 만든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 2008년에는 한글문화연대가 주최하는 ‘우리말 사랑꾼’에 선정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기업의 영업적인 전략에서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화로 자리매김했다. 광화문 글판은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광화문 글판은 대전 선화동에서도 볼 수 있다. 그 글판은 그동안 많은 시민들에게 문화적 감성과, 꿈과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구도심에 있어 보다 많은 시민들이 공유하지 못하는 아쉬운 점이 있다.

우리 지역에는 시인으로 등단하여 열심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염홍철 시장이 있고, 대전의 문화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수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있다. 그리고 늘 각종 문화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는 수준 높은 시민들이 있다. 이러한 분들과 더불어 둔산동 시청에도 광화문 글판 같은 ‘둔산동 글판’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시청 외벽에는 글판을 달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이것이 여의치 않다면, 대전시의 정책을 홍보하는 시청 앞 전광판을 활용할 수도 있다. 대전 시내 곳곳에 있는 광고 전광판을 활용하는 방법도 고려할 만하다. 관공서 차원에서 추진하기 어렵다면 대전의 대표기업이나 언론사에서 실행하는 방법도 바람직하다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광화문 글판 문안 선정위원회처럼 대전의 문인과 시민 등이 참여하는 ‘둔산동 글판 문안 선정위원회’를 만들어 운영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 많은 시민들이 아름다운 글을 만들고 찾아내어 응모하고 이를 선정하기 위해 행복한 고민을 하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절로 흥이 난다. 1년에 몇 차례 내걸리는 글귀를 통해 대전시민이 문학적 감성을 갖고 꿈과 희망, 위안과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더 없이 행복해지리라 믿는다. 이렇게 된다면 대전이 과학과 국제화의 도시라는 이미지에 문화도시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겨울강 눈보라에 내 몸이 쓰러져도/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되리’(2005년 겨울 정호승 시인의 겨울강에서)와 같은 아름답고 용기를 주는 글귀를 하루빨리 보고 싶다. 둔산동 글판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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