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부여 백제유적을 세계유산으로 [1]총괄

무령왕릉(武寧王陵) 발굴이 올해로 40주년을 맞는다. 무령왕릉은 우리나라 고분 가운데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게 된 최초의 왕릉이라는 점에서 고고학적·역사적 가치를 지녀왔다. 더구나 백제고분이 대부분 일제 등의 도굴 피해를 입은 가운데 온전하게 원형을 갖춰 발견된 것은 천우신조다. 대전일보사는 창간 61주년을 기념해 집중기획으로 ‘무령왕릉과 백제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시리즈를 연재한다. 무령왕릉 발굴 40주년을 통해 백제 역사 문화 연구의 어제와 오늘을 점검하고, 백제문화의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좌표와 발전 방향을 탐색한다.<편집자 註>

무령왕릉 발굴의 비화는 잘 알려져 있다. 1971년 7월 송산리 5호 석실분과 6호 전축분의 무덤 내부에 스며든 습기를 막기 위한 보수 및 배수로 공사가 진행된다. 인부들이 6호분 봉토 북측의 흙을 다지는데 뭔가 이상한 게 드러난다. 왕릉의 연도부(煙道部·굴뚝)였다. 급박하게 발굴이 진행됐고, 송산리 고분과 한몸으로 알았던 곳에서 새로운 왕릉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무령왕릉이다.

시시각각 드러나는 왕릉의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묘지석은 삼국시대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세계 고고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다. 중국 남조 양(梁)나라 지배층 무덤 형식을 그대로 재현한 아치형 전축분도 역사·고미술학계를 흥분케했다.

고분 안에서는 금으로 만든 관장식, 용과 봉황이 장식된 큰 칼, 글씨가 새겨진 팔찌 등 108종 2906점의 유물이 쏟아져나왔다. 동발(銅鉢)과 청자육이호(靑磁六耳壺), 지석 2매와 오수전 한 꾸러미, 석수(石獸) 등이 연도 입구에서 발견됐고, 현실 남쪽에서는 동발과 청자육이호가 나왔다.

무령왕의 유물로 추정되는 금제 관식 1쌍·금제 뒤꽂이 1점·금귀걸이 1쌍·은제 과대 외 요패 1벌·금동 식리 1쌍·용봉문 환두대도(龍鳳文 環頭大刀) 1점·금은제 도자(刀子) 1점 등이 출토됐고, 무령왕비의 금제 관식 1쌍·금제 이식 2쌍·금제 경식(頸飾) 2개·은제 팔찌 1쌍·금제 팔찌 1쌍·금은장 도자 2개·금동 식리 1쌍 등이 발견됐다. 출토된 유물 가운데 12종목 17건이 국보로 지정됐다.

왕릉의 절대 연대와 주인공을 알수 있게 한 지석은 몇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렸다. 지석에 뚜렷이 새겨진 ‘사마왕’은 무령왕이 살아 생전 불리던 이름이다. ‘일본서기’는 그가 왜 ‘사마(斯摩)’라고 불렸는지 설명한다.

“백제의 가수리왕(加須利君·개로왕)이 동생인 곤지에게 ‘너는 일본으로 가서 천황을 섬겨라’고 했다. 이에 곤지가 ‘원하건데 임금님의 부인을 내려 주시고 난 후 저를 보내주십시오’라고 했다. 가수리왕은 임신한 부인을 곤지와 결혼을 시킨 뒤 ‘지금 나의 아내는 이미 아기를 낳을 때가 가까워졌다. 만일 일본으로 가는 도중에 아기를 낳게 되면 부디 같은 배를 태워 속히 돌려보내라’고 했다. 곤지는 일본으로 출발했고, 임신한 부인은 쯔꾸시(筑紫)의 카가라노시마(各羅島·加唐島)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아기의 이름을 시마키시(島君·섬의 임금님)라고 했다.”

결국 ‘섬에서 태어난 아이=사마’라는 것인데 일본은 지금도 섬을 ‘시마’라고 읽는다. 당시의 섬으로 추정되는 일본 카가라노시마에는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동굴과 처음 씻겼다는 우물터가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을 동성왕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지만 무령왕릉의 발굴로 일본서기의 기록이 정확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일본서기가 백제라는 콘텐츠에서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보다 훨씬 정제되고 정확한 기록을 남긴 것은 아이러니다.

지석은 백제 왕실이 장례 절차도 알수 있게 했다. 사후에 바로 무덤에 안장하지 않고, 3년 동안 빈소에 모셔뒀다가 무덤으로 옮긴다는 사실이다. 지석은 무령왕이 서기 523년에 서거해 3년후인 525년에 안장됐고, 왕비는 526년에 서거해 529년 합장됐다고 밝히고 있다.

지석에 새겨진 무령왕비의 빈소였던 ‘유지’도 정지산 유적을 통해 확인됐다. 정지산 유적 건물터에는 40여개의 기둥 자국이 발견됐는데 사람의 거주지가 아닌 무언가를 모셔두는 장소였다.

금속 공예품들의 정교한 제작 기술은 백제 미술의 놀라운 수준을 알 수 있다. 1200만 화소의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한 환두대도(環頭大刀)는 칼 손잡이 중간 부분을 W자 모양을 따라가면서 800개의 금알갱이가 박혀있다. 금판에 알갱이를 붙이는 누금 기법 가운데서도 지름 0.5㎜의 금알갱이를 살짝 녹여 붙이는 ‘용착(鎔着) 기법’을 구사한 것은 놀라움 자체다.

무령왕릉은 전축분이라는 중국 남조 계통의 무덤 형식과 중국제 도자기, 일본산 금송을 사용한 관재 등의 존재를 통해 백제의 해상국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출토된 백자 등잔은 현재 존재하는 세계 최초의 백자다. 무령왕과 왕비의 목관 잔해물 분석 결과 재질이 금송으로 밝혀졌다. 금송은 일본 열도 남부지역의 특산물이다. 일본에서도 금송은 왕실이나 유력 귀족들이 관으로만 사용됐다.

베일에 가려있던 백제를 제대로 알 수 있게 한 무령왕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키자는 목소리가 거센 것도 이 때문이다. 무령왕릉이야 말로 고대 동북아의 역사·고고·고미술·사회·문화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무령왕릉은 지난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됐다. 하지만 십수년째 ‘잠정’의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서가 제출된 뒤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서 부적격 판정이 날 경우 재신청의 기회가 박탈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무령왕릉에 대한 연구와 학술대회는 수없이 이뤄졌다.

남은 일은 사람의 몫이다. 충남도가 설립을 추진하는 백제역사연구소를 구심점으로 학계와 지자체, 나아가 정부의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 백제의 이동경로를 정치, 문화, 종교, 사회 등 각 분야별로 추적하고, 한성-웅진-사비, 멀리는 조선-부여-백제로 이어지는 동북아 역사 밸트를 강력히 부각시켜야 한다.

무령왕릉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야 말로 동아시아 고대사를 제대로 정립시키는 시대적 사명임을 알려야 할 때다.

권성하 기자 nis-1@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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