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배(목원대학교 총장)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이하였다. 지난해 9월 취임한 이후의 세월을 돌이켜 볼 때 지난 4개월여의 짧은 기간이 까마득히 먼 옛일처럼 느껴진다. 새벽에 출근하여 캠퍼스를 둘러보고 각종 회의와 모임, 접견, 그리고 각종 단체나 기관과의 협약식, 게다가 입시철에 즈음한 일선 고등학교 방문까지 그야말로 숨 가쁘게 걸어온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지난 4개월이 4년쯤 지난 것처럼 느껴진다. 임무의 막중함을 헤아려 주어진 역할에 전념하다 보니 그야말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몇 달을 보냈다.

인간의 감각이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선 철학자들의 견해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필자의 생각엔 인간의 감각 중에서도 시간에 대한 감각은 유난히 믿을 것이 못 된다. 무엇인가를 애타게 기다릴 때의 시간은 아주 더디게 가는가 하면, 하루하루를 바쁘게 지내다 보면 시간은 실제보다 몇 배로 빨리 가는 듯하다. 우리말 속담에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도 실제의 시간이란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지각될 수 있음을 경험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토마스 드퀸시라고 하는 19세기 영국의 한 작가가 있는데, 그는 ‘어느 영국 아편쟁이의 고백’이라는 글로 유명해진 사람이다. 15세에 이미 그리스어를 통달할 만큼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지만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마음에 들지 않는 후견인들의 손에 맡겨지면서 가출하여 런던의 거리를 배회하는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머리의 심한 만성적인 통증 때문에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아편쟁이의 길을 간 사람이다.

처음 마약을 복용했을 때 머리의 통증이 사라졌기 때문에 통증이 있을 때마다 마약에 의존하다 보니 그는 거의 십여 년 가까이 그것을 탐닉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마약의 부정적인 효과가 나타났는데, 지속되는 복통과 함께 나중에는 손가락 하나도 들어 올릴 힘조차 없어 매일 누워만 있어야 했다고 고백한다. 마약에 탐닉한 지 채 10년도 안 되어서 그는 완전히 폐인이 되었다.

그가 지적한 마약의 여러 가지 부정적인 효과 중에 필자의 관심을 끄는 것 하나가 시간감각의 왜곡현상이다. 드퀸시는 마약을 복용하면 런던 시내를 배회하곤 하였는데, 한두 시간을 산책했는데도 마치 천 년의 세월이 흐른 것 같거나 하루 종일 쏘다녔는데도 잠깐 나갔다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고 고백한다. 마약이 시간의 흐름을 지각하는 감각을 마비시킨 탓이긴 하지만, 마약이 아니더라도 바쁘게 살다 보면 시간이 이렇게 느껴지는 때가 종종 있다. 올 한 해가 어떻게 느껴질지는 어떤 일을 위해 그 일 년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을 도둑맞는 일은 가급적이면 피해야 한다. 요즘 청소년들이 즐겨하는 컴퓨터 게임뿐만 아니라 성인들도 좋아하는 온갖 오락거리가 그런 것들 중 하나인데, 이것들은 마약보다도 더 위험하다. 쉽게 접할 수 있는데다가 한 일도 없이 마약처럼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잊게 하기 때문이다. 게임에 빠진 아이들을 내버려 두면 밤을 새기도 한다. 수없이 배우고 익혀야 할 나이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백해무익한 것에 빠져 허송세월한다면 그 아이가 자라서 무엇이 될지 빤한 일이다. 이들이 게임 아닌 다른 좋은 일에 그렇게 탐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쨌든, 필자가 바쁜 일정 중에서도 꼭 하는 일이 하나 있다. 이른 아침에 출근하여 도서관과 강의실을 둘러보는 것이 그것이다. 혹시 그 이른 시간에 학교에 나와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그 이른 시간에 강의실이나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공부의 참맛을 알고 있거나 적어도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공부에 몰두하는 학생일 것이다. 다행히도 아직은 그런 학생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어떤 학생들은 작품을 완성하느라고 밤을 꼬박 새운 경우도 있다. 좋은 일에 몰두하여 시간을 잊은 이들이다. 필자는 이들과 지도교수님들을 함께 총장실로 불러 격려하고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을 잊고 공부와 작품 활동에 탐닉하는 그들이야말로 장차 이 사회를 맡길 만한 인재들 아니겠는가?

올 한 해도 순식간에 지나가고 말 것이다. 이 해의 끝자락에 서서 한 해를 뒤돌아볼 때 열심히 한 일이 아주 많아서 일 년이 천 년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진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것 같다. 주어진 역할에 신명을 다 바치는 것은 주어진 시간 안에서 남들보다 몇 배의 삶을 더 사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삶을 귀하게 여기고 찬미하는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가 말했듯이, ‘삶은 예찬할수록 축하할 일이 그만큼 더 많아진다.’

올 한 해 축하할 일이 가득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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