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이맘때면 이곳저곳에서 성탄카드와 연하장을 받으면서 세밑임을 실감한다. 한편으론 카드를 받을 때마다 나 자신이 얼마나 게으르고 대인관계를 소홀히 하고 있나 하는 자괴감에 젖기도 한다. 아무리 자주 보는 얼굴이라도 글로써 주고받는 대화는 훨씬 깊은 인간미와 솔직함을 전해주는 법인데 먼저 카드를 띄우지는 못할망정 제때 회신도 못하니 참으로 나태하다.

카드를 받고 나면 보내준 사람과의 인연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멀리 오타와의 이태은 사범님(캐나다 태권도계의 대부)은 올해도 잊지 않고 가장 먼저 카드를 보내오셨다. 처음 이민 와서 나를 보살펴주기 시작한 이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먼저 카드를 보내 안부를 전하신다. 그분이 왜 그리 연방정부와 한인사회 등에 발이 넓은지 이해할 만하다. 뛰어난 인물은 역시 인간관계가 특출한 법이다.

10여 년 전에 이민 와 영어교사로 처음 사귄 펄(Pearl) 여사는 그 후 한동안 카드를 주고받았지만 어느 해부터인가 슬그머니 나의 카드 발송 목록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나와 아내를 위한 개인 가정교사 역할을 했던 그녀에게 우리는 일종의 의무감 비슷한 것을 갖고 있으며 이 때문에 형식적이나마 가끔 인사를 드리곤 했는데 이젠 그것마저 귀찮아져 버리고 말았다. 사람이란 얼마나 얄팍한 존재인지.

시대가 변한 탓인지, 이젠 많은 사람들이 이메일로 안부를 주고받는다. 그러나 서한이란 자고로 자필로 쓴 글씨 속에 온정이 오가는 법인데 컴퓨터 글체로 인사를 주고받으니 별로 정감이 없다. 기계적 공간에서 주고받는 밋밋한 교신에 따뜻한 정이 흐를 리 없다. 인간적 체취가 배어나지 않고 가식적이다. 편리하기는 하지만 성의가 보이지 않는다.

예전엔 편지나 카드의 겉봉만 봐도 그것이 누가 보낸 것인가를 금방 알 수 있었으나 요즘엔 주소마저 컴퓨터로 찍어 보내니 언뜻 봐서는 누가 보낸 것인지 알 수도 없다. 어릴 때 밤을 새워가며 카드 문구를 쓰던 정성은 어디로 가고 안일하게 컴퓨터 앞에 앉아 손가락이나 까딱거려 보내자니 무성의하다. 이러다 보니 기계적인 이메일보다는 차라리 전화로 안부를 전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세밑은 왠지 쓸쓸한 법이니 이럴 때일수록 그리운 사람들끼리 정다운 목소리라도 들으면 좋지 않을까.

이런저런 모임이 이어지면서 심신이 피곤해지기 시작한다. 별 의미도 없는 송년모임에 나가 웃고 떠들면 잠시나마 스트레스는 풀리지만 끝나고 나면 이내 공허함에 빠져들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도 가끔은 이민 오길 잘했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에서는 동창회 등에 나가면 사회적으로 잘나가는 친구들만 눈에 띄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친구들은 잘 볼 수가 없었다. 이민사회에도 그런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고국을 떠난 이방인들이라는 동질감 때문인지 만나면 우선 반갑다.

한국에서는 특히 허영심에 찌든 일부 여성들이 동창회 등의 모임에서 까칠한 부(富)를 과시하기 위해 온갖 장식품을 주렁주렁 매달고 나타난다. 이곳에도 그런 머리 빈 여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허영심의 정도는 약한 것이 사실이다.

한편에서는 송년회니 망년회니 해서 시끌벅적하지만 가슴 아픈 사연도 많다. 호화로운 쇼핑몰에 인파가 북적대는 요즘이지만 병상에서 외롭게 투병하거나 실직의 고달픔에 시름겨워하는 동포들도 많다. 1주일 전 성당 교우분의 병상을 다녀온 후 마음이 몹시 심란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엊그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평생 누구에게 나쁜 소리 한 번 안 하고 열심히 살아온 분이 암 투병에 힘들어하다 떠났다. 곁에서 간병하느라 지친 부인의 야윈 모습은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럴 땐 신(神)이 야속하다. 신은 왜 착한 사람을 먼저 데려가시는가.

모국에서는 천안함 폭침이니, 연평도 포격이니 해서 연중 내내 긴장과 갈등이 이어졌지만 언제 그랬느냐는 듯 이내 평상으로 돌아오는 모습들이 신기하기만 하다.

이제 하릴없이 분주하던 연말모임도 끝나가니 차분히 주위를 돌아볼 때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정성 들여 그리운 지인들에게 연하장도 써볼 일이다. 좀 늦게 도착하면 어떤가. 정성이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대전일보 가족들에게 지면을 통해 세밑 인사를 드린다.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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