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혁명·검열…민초의 편에서 현대사 굴곡·영광 함께해

대전일보는 계엄이 해제되고 검열이 사라지자 4₩19 당일의 상황을 담은 생생한 사진
을 특집 화보로 실었다. 1960년 4월 26일자 2면.
대전일보는 계엄이 해제되고 검열이 사라지자 4₩19 당일의 상황을 담은 생생한 사진 을 특집 화보로 실었다. 1960년 4월 26일자 2면.
대전일보 1960년 4월 21일자 1면은 신문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게 훼손됐다. 톱기사의 제목과 글씨를 단 한자도 알아볼 수 없고 왼쪽 사진도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게 지워졌다. 계엄령이 내려지고 경찰과 군이 경쟁적으로 기사를 삭제한 탓이다.

그해 3~5월 대전일보 지면에는 우리 현대사의 상처가 진하게 배어있다. 3.15 부정선거와 마산시위에서 4.19혁명, 그리고 그 사후처리에 이르는 혼란과 영광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대전일보는 민주화와 한국 정치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제공한 4.19 내내 다양한 기사와 주장을 실어 언론의 역할을 다했다.

대전일보 1960년 3월 9일자 3면에 ‘학원에 자유를 달라 절규, 대고생들이 데모’라는 기사가 실렸다. 8일 오후 대전공설운동장에서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 유세가 열렸는데 여기에 학생들의 참가를 금지하자 학교를 벗어나 가두에 진출했다. 2월 28일 대구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데모가 서울과 수원을 거쳐 대전까지 파급된 것이다. 대고의 데모는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수그러들었지만 대전상고, 대전공고, 보문고 등에서도 비슷한 조짐이 나타나 경찰이 학교와 시내 일원에 배치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3월 15일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는 4할 사전투표, 3~5인조 공개투표, 유령 유권자 조작, 야당 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등 최악의 부정이 저질러졌다. 개표 결과 이승만이 85% 득표율로 대통령, 이기붕은 73%로 부통령에 각각 당선됐다. 투표 당일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벌어지자 경찰이 총을 쏴 7명이 숨지고 8백여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 행방불명됐던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4월 11일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바닷가에서 발견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대전일보는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계속되자 적극적으로 기사를 싣고 사설을 통해 정부의 잘못을 비판했다. 4월 1일자 사설에서는 온갖 방법으로 부정선거를 저지른 자유당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준엄한 심판인 내려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4월 7일자는 1면 톱에 ‘민주당 드디어 데모 강행’을, 13일자에는 ‘마산에 또다시 데모’를 싣는 등 연일 시위 관련 기사가 실렸다. 19일자에는 충북 청주상고 학생 1000여명의 집회 기사가 실렸고 20일에는 1면 톱에 서울대 건국대 동대 등의 시위를 보도했다. 1면 톱 기사 옆에 ‘보라! 갖가지 부정 어찌 한숨만 쉴소냐!’라는 격문(檄文)을 그대로 실었다.

4월 18일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인 뒤 귀가하던 고려대생이 폭력배의 습격으로 10여명이 부상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19일에는 서울 시내 대학생들이 시위에 참여, 선언문을 낭독하고 중앙청으로 행진했다. 고등학생과 일반시민도 대거 데모에 동참했다. 경찰이 경무대로 통하는 거리를 막고 무차별 발포, 사상자가 발생하자 데모 군중은 경찰 지프차를 불태우고 경찰서와 파출소를 파괴했다. 당황한 정부는 오후 3시 서울 대전 대구 부산 광주 5개 도시에 계엄령을 내리고 탱크를 앞세운 군을 진주시켰다.

계엄이 내려진 뒤 대전일보 지면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군데군데 기사와 사진이 지워진 채 발행된 것이다. 군과 경찰이 심하게 검열을 하고 취재와 편집에도 온갖 압력을 가했다. 시위와 집회, 야당의 활동이나 외국의 반향을 다루는 기사의 작성과 보도를 제한하고 수시로 기사를 삭제했다.

25일에는 서울 지역 대학교수 259명이 “대통령 이하 3부 요인들은 3 ·15부정선거와 4 ·19사태의 책임을 지고 즉시 물러나는 동시에 정부통령선거를 다시 하라”는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구속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며 데모에 나섰다.

대전일보는 이러한 흐름에 적극 부응했다. 4월 25일 부정선거 원흉 몰아내자는 야당의원 발언을 전하고 2면에는 ‘청사에 남을 4.19 그날의 모습’이란 화보를 실었다. 시위대가 경무대 앞까지 진출한 장면을 비롯 총격에 쓰러진 학생을 운반하는 모습 등이 담긴 사진이었다. 검열로 묶였던 사진을 뒤늦게 보도한 것이다.

26일자 3면에는 ‘수난의 신문 132시간’이 실렸다. 19일 오후 5시부터 25일 오전 9시까지 검열이 이뤄진 기간을 다룬 기사였다. 이 기사에 따르면 20일 아침 지방으로 발송하려던 신문 전량이 대전역에서 압수됐다. ‘검열부’는 데모에 관한 기사나 사진, 민심을 자극할 만한 것도 빼냈다. 호외나 속보를 내는데도 일일이 검열을 받아야 했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이승만 대통령은 26일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고 약속했다. 대전일보 27일자 조간 1면에는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 사임, 이대통령 시국 수습에 중대 성명’이란 기사가 실렸다. 3.15부정 선거 규탄으로 시작된 시위가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키고 4.19혁명 완성으로 끝나게 된 것이다.

대전일보는 4.19 이후 부정선거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와 처리를 지속적으로 다루고 자유당정권이 저지른 비리와 부정을 폭로, 지역민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민주당 정권의 등장에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소모적 정쟁과 무능으로 일관하자 자유당 때보다 달라진 게 없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1960년 격동의 시기 대전일보 하루하루 지면에는 이 땅에 살았던 민중의 고통스런 숨결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김재근<대전일보 미디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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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일보 1960년 4월 21일자 1면. 계엄당국의 검열로 톱기사와 사진이 심하게 훼
손된 채 발행됐다.
대전일보 1960년 4월 21일자 1면. 계엄당국의 검열로 톱기사와 사진이 심하게 훼 손된 채 발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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