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공설운동장(한밭종합운동장)은 1949년부터 사업추진이 이뤄져 60년대 중반에 대체적인 틀을 갖췄다. 제60회 전국체전이 개최된 1979년 당시 운동장 전경.
대전공설운동장(한밭종합운동장)은 1949년부터 사업추진이 이뤄져 60년대 중반에 대체적인 틀을 갖췄다. 제60회 전국체전이 개최된 1979년 당시 운동장 전경.
충청권 대형 사업 중에서 대전공설운동장(한밭종합운동장) 만큼 우여곡절을 겪은 것도 드물다. 사업 시작에서 착공과 중단, 재착공 등 무려 15년에 걸쳐 온갖 좌절과 풍상을 견뎌야 했다.

1955년 5월 7일 대전일보에는 ‘공설운동장 설치 와해에 직면’이란 기사가 실렸다. 2년간이나 추진돼온 공운 조성이 체육인과 추진위원들의 무성의와 땅 문제 탓으로 중단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공운 조성에는 험난한 역정이 예고됐다. 종합운동장을 갖는 게 지역민들의 한결같은 염원이었지만 대전시는 땅도 없었고, 이렇다할 예산도 마련하지 못한 터였다.

공운 건설은 해방 직후부터 거론됐다. 대전의 인구가 20만을 넘었지만 스포츠나 공연, 집회를 할만한 넓은 장소가 없었다. 시내 중심가의 대흥초등과 선화초등, 대전철도청 운동장을 빌어 경기를 하고 행사를 하는 게 전부였다. 스포츠인과 젊은이들이 마음껏 뛰놀고 지역의 다양한 행사를 소화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은 체육계는 물론 교육, 문화예술, 정치계의 공통된 희망이었다.

공운 조성의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49년이었다. 당시 손영도 대전시 부윤(府尹: 시장)은 문화동 연병장에 운동장을 만들기로 하고 삽질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듬해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사업이 중단됐다.

전쟁으로 도민들의 관심밖으로 밀려나있던 이 사업은 1956년 본격 추진의 막이 오른다. 그해 박완식 대전시장을 비롯 홍재현 백락호 김종렬 김재영 홍남성 등이 참여한 대전시공설운동장설립기성회가 출범했다. 자금 조성과 사업추진이 장벽에 부딪치자 56년 12월 19일 기성회를 해체하고 민병기(도지사), 김용간(시의회 의장), 김임룡(검찰청장), 오인순(도 문교사회국장), 홍재현(시의회 부의장), 김영배(부시장), 진성섭(대전중학교장) 등이 참가한 공설운동장설치추진위원회를 창립하였다.

추진위원회까지 만들었지만 부지 확보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대전시와 추진위는 공운 부지로 보문산 자락 부사동·대사동 일대 5만4000평을 선정했다. 일제때 종방(鍾紡) 부지였던 이곳은 국유지로 주민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대전시가 중앙정부에 농지 사용목적 변경을 신청했지만 경작자들과 분쟁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거부됐다. 철도용지로 교통부 재산이었지만 실제로는 인근 주민들이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농림당국과도 이해관계가 얽혔다. 농민들은 경작권을 인정해달라고 진정서를 내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소관 부처가 어디냐를 싸고 2년여 동안 공문만 오락가락 하며 질질 끌던 땅 문제는 1956년 3월 27일 박완식 대전시장이 대전철도 당국과 매매계약을 체결하면서 해결의 실마리가 잡혔다. 땅값은 1635만환으로 3년 상환 기한이었다. 농민 64명에게는 대전시가 이작료(離作料)를 지급하기로 했다.

대전시는 56년 4월 축구, 핸드볼, 야구, 육상, 정구장 등 5개 경기장을 조성하는 내용의 설계를 완료했다. 사업 추진 2차년도인 57년에는 의욕적으로 핀란드 수도 헬싱키 경기장을 모델로 새로운 설계에 착수했다.

그러나 경작자와 예산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농민들은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왔다는 연고권을 내세워 자신들에게 땅을 분배해야 마땅하다며 농지위원회에 제소했다. 경작자 문제는 1957년 11월 충남도 농지위원회가 평당 350환(총 1800여만환)의 이작료를 지급하라고 중재결정을 내림으로써 매듭이 지어졌다. 2년 동안 경작자들은 평당 450환을 요구했고, 대전시는 200환을 지급하겠다며 버텨왔던 것이다.

예산 확보는 더욱 어려웠다. 공운 조성에는 7억환 정도의 예산이 필요했지만 대전시는 57년에 시비 1000여만환을 투입했고, 이듬해에도 시비와 국비 도비를 합해 2500여만환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이때문에 당초 58년 말 필드경기장을 1차로 완공하려 했지만 계속 미뤄졌다.

이런 가운데 대전공운 조성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60년 1월초 대전시가 제41회 전국체전 유치에 성공한 것이다. 대전시는 전주시와 치열한 경쟁 끝에 대한체육회 이사회 투표에서 15대 7표로 승리를 거뒀다.

그해 10월 3일 개막되는 전국체전을 치르기 위해 대전시는 공운 조성에 박차를 가했다. 주경기장은 그런대로 사업이 진행됐지만 정구장과 배구장은 착공도 못했고, 사업에 착수한 야구장은 1억4천만환이 필요했다. 대전시는 예산확보를 위해 중앙정부에 보조금 지원 확대를 요청하는 등 백방으로 뛰었다. 덕분에 주경기장 등 일부 시설이 완성돼 전국체전을 무사히 치를 수 있었다.

공운을 완성하기 위한 노력은 60년대 중반까지 계속됐다. 61년 당시 공정이 30%선이었는데 추진위원회는 신임 황창주 대전지검장에게 위원장을 맡겨 국비지원을 부탁하기도 했다. 1202 공병단이 야구장을 조성하는데 불도저 등 중장비를 직접 지원하기도 했다.

대전시와 충남도의 노력, 각계의 도움 덕분에 대전공운은 1964년 육상경기장과 야구, 배구, 농구, 정구장 등을 갖춘 종합운동장으로 탄생했다. 그 뒤로 충무체육관과 수영장이 잇따라 들어서고 리모델링이 이뤄져 중부권의 최고 스포츠컴플렉스로 성장했다. 대전공운(한밭종합운동장)이 들어서기까지 각계각층이 기울인 눈물겨운 노력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김재근<대전일보 미디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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