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으로 대전시내 곳곳에는 무허가 판잣집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 1950년대 대전천변 판잣집. 사진=사진과 기록물로 보는 대전 60년사
6·25 전쟁으로 대전시내 곳곳에는 무허가 판잣집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다. 1950년대 대전천변 판잣집. 사진=사진과 기록물로 보는 대전 60년사
<1955-56년 대전시내 판잣집 철거>

눈물과 반발 속 삶의 터전 6000여호 사라져

도시미관 교통, 등 이유 경찰 입회하 대대적 철거

철거민들 물, 전기도 없는 외곽으로 이주 큰 고통

전국적 철거 선풍, 대덕군에서는 40대 남자 자살도

1955년 3월 중순 대전시와 대전경찰서, 서대전경찰서는 긴급 기관장연석회의를 열었다. 이날 회의에서 대전시는 다음 달 초부터 무허가 건물 철거를 강행키로 하고 여러 기관도 적극 협조하기로 결정했다. 55-56년 대전시내에 큰 혼란과 파문을 불러일으킨 판잣집 철거가 시작된 것이다.

6.25 전쟁으로 대전시는 전국 어느 도시보다 심하게 파괴됐고 곳곳에 무허가 건축물이 들어섰다. 대전천을 비롯 중앙시장과 중앙로, 도청과 시청 주변에도 목재와 벽돌 조각으로 얼기설기 엮은 허름한 집들이 생겨났다. 북쪽에서 밀려온 난민은 물론 대전시민 상당수도 비와 바람만 겨우 가린 판잣집을 짓고 삶을 이어갔다.

전쟁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면서 무허가 건물 철거가 현안으로 등장했다. 일부 판잣집이 사유지나 국공유지에 무단으로 지어졌고, 도로와 하천 등을 점유한 상태였다. 대전시는 55년 1월 도시미관과 교통, 보건 등을 이유로 8791호의 판잣집을 연내 철거하겠다고 발표했다. 3월까지 자진철거하라며 불응한 곳은 4월부터 강제철거하겠다는 내용의 계고장을 판잣집마다 부착했다.

1차로 1600여호에 철거 딱지를 붙였지만 자진철거에 응한 곳은 3백여호에 불과했다. 마침내 대전시는 4월 1일부터 경찰 입회 아래 공무원과 소방서, 인부 등 1백여명의 인력을 동원 대전역앞 정동 4번지, 영교와 목척교 서편, 보문교-대흥교에 이르는 3개 구역에서 철거를 시작했다. 주민들은 체념하고 옷가지와 살림살이를 챙겨 떠났지만 일부는 “갈 곳이 없다.”며 철거를 늦춰달려고 애원했다.

사전 예고나 계고장도 없이 철거가 이뤄진 집도 있고, 가동 중이던 공장을 부숴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다. 대전시는 10일 동안 당초 계고장을 붙인 것보다 260호나 많은 1841호를 철거했다고 발표했다. 일부 가정은 아무런 사전 통보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거처를 잃은 것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철거민에게 당장 잠잘 곳과 먹을 것이 없다는 점이었다. 1차 철거로 집을 잃은 인구는 약 1만명에 이르렀는데 이중 절반 정도가 품을 팔아 하루하루 연명하는 빈민과 난민이었다. 대전시는 ‘자진철거’라는 이유로 아무런 구호대책도 마련하지 않은 상태였다. 철거 난민들이 대전시에 집단으로 몰려가 애소했지만 비축해놓은 곡식이 하나도 없다는 말만 들었다.

중심가에서 쫓겨난 난민들이 대동과 대사·부사동 등의 산 기슭에 다시 판잣집을 지었지만 모든 게 열악하기 이를데 없었다. 전기도 안들어왔고 먹을 물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삶의 터전을 상실한 것도 큰 고통이었다. 도심에서 짐을 나르거나 노동과 장사로 벌어먹다가 외곽으로 밀려나자 일거리도 없었고 장사를 할 수도 없었다.

철거민의 생계가 위협받자 대전시의회에서는 시의 무책임한 처사를 비판하고 관계자 인책을 요구했다. 한 의원은 대전 도심의 건물의 93%가 판잣집이라며 피도 눈물도 없이 마구 철거할 것이냐고 따졌다. 시의회는 중앙정부에 강제 철거를 완화해달라는 진정서를 보냈다.

대전시는 정부방침을 이유로 8월에는 4천여호에 계고장을 발부하고 대대적인 철거에 나선다. 전국적인 철거 강행에 반발, 대전시와 인접한 대덕군 동면 세천리에서 한 주민이 음독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40대의 이모씨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불쌍하고 가련하게 판잣집에서 사는 사람들을 돌보아주십시요. 저는 대책이 없어 죽지만 남은 국민들을 괴롭히지 않게 해달라”는 유서를 남겼다.

9월 2일에는 대전일보에 대전의 평안남도 및 평안북도 도민회가 ‘대전시장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실었다. 도민회는 이 글에서 철거민에게 제공한 택지(임야)에 전기와 식수 공급이 안되고, 목재나 식량도 전달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난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철거가 계속돼 55년 1년 동안 대전에서 5099호의 판잣집이 철거됐다. 이듬해에도 철거 선풍은 계속된다. 대전시는 56년 4월 1차로 1026호를 없애기로 하고 강제력을 동원, 중동의 공설시장과 중앙시장에서 철거작업을 벌인다.

강제철거는 1956년 중앙정부가 정책을 선회하면서 중단된다. 4월 3일 치안국장이 전국의 가건축물 및 판자집 철거를 무기연기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준비 없이 시작한 강제철거가 난민을 극한으로 내몰아 엄청난 희생을 초래한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55년과 56년 4월초까지 대전시내에서 약 6천호의 판잣집이 철거됐다. 1가구에 5명 정도의 가족이 거주한 것을 감안하면 당시 대전시내 인구 20만명의 15%에 이르는 3만명의 시민의 집을 잃은 셈이다. 강제철거로 밀려난 난민들은 또다시 대전시 외곽에 판잣집을 지은 채 굶주림을 감내해야 하는 절대빈곤의 처지로 전락했다. 판잣집이 사라진 곳에는 새 건물이 들어서고 도로도 말끔하게 정비됐다. 판잣집 철거의 대가로 대전 도심의 면모가 일신된 것은 인간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김재근<미디어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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