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법조칼럼

미국 시카고의 저명한 의사인 닥터 킴블은 어느 날 외출했다가 집으로 돌아와 괴한의 습격을 받고 죽어가는 아내를 발견한다. 그런데 그는 곧 아내 살인범으로 몰리고 재판까지 받게 된다. 그는 재판과정에서 무고함을 호소했지만 결국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된다. 우여곡절 끝에 탈출한 그는 천신만고 끝에 진범을 찾아내 법의 심판을 받게 한다. 영화 ‘도망자’의 내용이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도 촉망받는 은행 간부인 앤디 듀프레인이 아내를 살해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20여 년간 수형생활을 하다가 끝내 쇼생크 감옥에서 탈출한다. 두 영화 모두 주인공이 아내를 살해하였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죄판결을 받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닥터 킴블은 결국 진범을 찾아 자신의 무고함을 세상에 알렸지만 앤디는 감옥 탈출에만 성공하였을 뿐 자신의 무고함은 끝내 밝히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안정적인 사회생활을 하던 주인공이 아내 살인범으로 몰린 것도 극적이지만 우여곡절 끝에 감옥을 탈출하거나 진범을 찾아낸다는 이야기는 더 극적이어서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로 보인다.

무고한 시민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죄판결을 받아 옥고를 치르는 일이 영화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1981년쯤 전라도의 어느 공사장 인부이던 김 아무개 씨는 길을 가다 마주친 사람을 살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1심에서는 살인혐의에 대하여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항소심에서는 유죄로 인정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다행히 상고심 계류 중에 진범이 체포되었고 대법원에서도 살인죄에 대하여 무죄 취지의 파기 환송 판결을 받았지만 김씨가 그 과정에서 겪었을 고초를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유죄를 선고하였던 항소심 법원은 그가 경찰에서 수사받을 때 작성하여 제출하였던 살인 범행을 자백하는 내용의 자술서를 유력한 유죄의 증거로 삼았는데, 나중에 김씨는 담당경찰관의 가혹행위에 견디다 못해 그러한 자술서를 작성하였다고 밝혔다. 1992년쯤 서울의 어느 경찰서에서 순경으로 근무하던 김 아무개 씨도 여관에서 여자친구를 살해하였다는 혐의로 구속기소되어 1심과 항소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가 대법원에서 무죄 취지의 파기 환송 판결을 받았는데, 이 사건에서도 나중에 진범이 붙잡혀 수사당국과 1, 2심 법원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현직 경찰관이던 김씨조차도 자신을 옭아매는 억울한 누명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해내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반인으로서 그와 같은 누명을 쓸 때는 얼마나 막막하고 세상이 두려울 것인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두 사건은 형사재판을 담당하는 법관들이 거울로 삼아야 할 대표적인 사례로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일은 왜 생기는 것일까? 수사기관의 과잉 의욕이나 관련자들의 무책임하고 악의에 찬 증언 때문일 수도 있고 재판을 맡은 법관의 판단에 소홀함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의 인식력과 판단력의 한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형사재판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벌어졌던 일을 관련자들의 진술과 기타 증거자료들을 근거로 재구성하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을 확정한 다음에야 비로소 거기에 어떠한 법리를 적용하여 어떠한 결론을 내릴 것인지 결정하게 되는데, 법관의 고민은 대부분 사실확정의 어려움에 기인한다. 우리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거나 과거에 벌어졌던 모든 일을 비디오테이프에 담아놓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바람일 뿐이다. 가끔은 후고구려를 세웠던 궁예처럼 관심법을 구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헛된 생각을 할 때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러한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법관은 피해자나 목격자들의 기억과 그것을 보충할 정황증거들을 모으고 거기에 논리칙과 경험칙을 적용하여 사실을 확정한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법관에 의하여 확정된 사실이 진실로 과거에 있었던 사실과 일치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은 항상 있다. 피해자나 목격자들이 수사기관이나 법정에서 악의적으로 기억에 반하는 거짓 진술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람의 기억은 완벽한 것이 아니어서 그들이 진실이라고 믿는 기억도 실제로는 사실에 반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법관들은 심리학 등 인간의 행태를 연구하는 인접학문의 도움을 얻어 사실인정의 정확성을 제고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국민참여재판(배심재판) 등을 통하여 혹시 모를 독단적인 판단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도 부단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판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다만 오판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할 뿐이다.

헌법과 형사소송법에 규정된 무죄추정의 원칙과 그로부터 파생된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을 위한 여러 제도들은 오판의 가능성으로부터 무고한 피고인을 지켜내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들이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그에 대한 분노의 공적인 표출은 그 피고인이 유죄의 확정판결을 받은 다음에 하여도 늦지 않다. 모든 형사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

<대전지법 서민석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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