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지역경제

1933년 설립되어 지역 경제계의 구심점 역할을 해온 대전상공회의소의 1960년대 회관 모습.
1933년 설립되어 지역 경제계의 구심점 역할을 해온 대전상공회의소의 1960년대 회관 모습.
‘연료 보국(燃料 報國)! 구공탄 제조 판매합니다.’

1950년 11월 17일자 대전일보에 등장한 광고 문구다. 대전시 중동에 위치한 한 회사가 분탄을 가져오면 구공탄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6.25 당시 지역경제는 어떠했을까? 전쟁은 지역경제를 폐허로 몰아넣었다. 집과 건물, 공장을 모두 파괴하고 철도와 도로 교량 등 사회간접자본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해방 이후 1948년 9월부터 일본인과 일본 기업들이 소유했던 귀속재산 불하가 이뤄지고 공장들이 겨우 다시 돌아가던 차에 전쟁이 일어나 모든 것을 앗아간 것이다.

대전일보 초기 지면에는 열악한 경제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쌀과 먹거리, 땔감, 주택 관련 기사가 빈번하게 실린다. 시중 쌀값이 폭등하고 여기저기서 굶어 죽는 사람이 발생했다. 난민들에게 방한칸이라도 내줘 추위를 견디게 하자는 기사도 나온다.

이처럼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기업과 업소가 등장, 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대전일보 51년 4월 3일자에는 ‘호텔 성남장’ 개업 광고가 실렸다. 전쟁 초기 대전에 내려온 이승만 정부의 각료들이 머물렀던 대전시내 유명 숙박업소가 다시 문을 연 것이다. 남북여객자동차라는 회사가 대전-대구-부산 간 여객차(旅客車) 운행을 시작했으며, 용운이라는 식당과 군인회관이 개업인사를 했다. 충성양조에서는 ‘충성’이라는 청주를 판매하고, 식초를 만드는 대동산업사, 야루스 사장(사진관), 국일관(식당), 남양미장원 등이 광고란에 등장했다.

현재 지역경제계의 얼굴로 성장한 기업들도 속속 얼굴을 내밀었다. 대전일보 51년 4월에는 남선기공의 영업종목 안내 광고가 실렸다. 50년 3월 창립했던 공작기계 전문회사가 전화를 딛고 다시 영업을 재개한 것이다.

52년부터 대창장유사(현 진미식품)가 활발하게 움직였다. 1948년 송희백이 창업한 회사가 전쟁의 혼란을 딛고 고추장과 된장 간장 등의 상품을 출시한 것이다. 진미식품은 57년 대전시 오류동으로 공장을 이전하고, 58년에는 군납업체로 선정되는 등 성장가도를 달렸다.

대전을 연필산업 도시로 알려지게 한 동아연필도 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일제하 대전시 삼성동에 설립됐던 공장이 전쟁 중에 여러 번 귀속재산 매각이 유찰된 끝에 어렵사리 불하가 이뤄져 다시 연필을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1952년에는 대전시내에 미락(味樂)과 유락(有樂)이란 식당이 등장했다. 이들 식당은 훗날 거리 이름이 ‘미락통’과 ‘유락통’으로 불릴 정도로 성공을 거뒀다. 한때 대전의 명소였던 화월식당이 영업을 시작하고 56년에는 설렁탕과 깍두기로 유명한 한밭식당이 영업을 시작했다.

대전시내에 극장도 우후죽순처럼 얼굴을 내밀었다. 시공관은 전쟁 중에도 쉼 없이 영화를 상영하고 각종 행사와 공연을 치러냈다. 53년에 등장한 대전극장(경심관)을 시작으로 대국·중앙·신도·동화·신흥·고려극장 등이 경쟁에 합류했다.

70-80년대까지 지역경제를 주도했던 대전피혁·대전방직·대전초자(硝子)·조선이연·대영메리야스·부국식료·대전고무공업 등이 활발하게 영업활동을 벌였다. 중견 제조업체로 성장한 대륙고무벨트(한국 카모플라스트)·안전공업·동양강철도 50년대 초·중반 가동을 시작했다. 대한주조·풍국주정·대전주정·조화양조·충남양조·대천양조·천일양조 등의 주류회사와 금강사이다, 대전사이다 등 음료회사가 치열한 경쟁을 전개하고 계룡버스·충남여객·중앙택시·한흥여객 등의 운수회사가 전쟁 중에 운행을 시작했다. 창신문구·대전양행안경원·중앙종묘·성사진관·애국흑판·장치과·조내과 등도 이무렵 얼굴을 내밀었다.

1952년 7월에는 대전방적이 경제계의 관심사로 부상했다. 전쟁전 직원이 700여명에 이르렀던 이 회사가 대구의 삼호방직 정재호에게 불하됐는데 정씨가 이 공장의 방직기를 대구로 빼냈던 것이다. 지역경제를 악화시키고 귀속재산처리법을 위반했다는 지적이 일자 당국이 수사까지 벌이기도 했다.

1951년 6월 공포된 중앙도매시장법에 따라 대전 중앙도매시장이 10월부터 영업을 개시했다. 중앙시장은 교통의 편리함에 힘입어 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이전인 70년대까지 삼남의 중심시장으로 기능했다.

전쟁으로 제조·상업·건설·수산·의료·광업·농림업 등 1698개 지역기업(대전 충남 산업 시설의 60%)이 파괴 또는 소실됐으며 폭격이 심했던 대전은 대부분의 기업이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런 폐허 속에서도 기업인들은 기계를 수습하고 새로운 상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기업인들은 좌절하지 않고 다시 공장을 돌리고, 상인들은 식당과 옷가게를 시작했다. 당국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대전시내 곳곳에 가시장(假市場)이 형성돼 먹거리와 옷가지, 구호물자가 거래됐다. 50년대초 영업을 재개하거나 창업한 업체의 상당수는 큰 성공을 거뒀고, 국내 대표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곳도 있다. 역설적으로 전쟁의 폐허와 잿더미가 지역경제와 한국경제의 자양분이 됐던 것이다.

김재근<대전일보 60년사 편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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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은 공장과 상가 등 경제를 모두 파괴했다. 폐허가 된 시가지 한켠에서 천막을 친 채 생필품을 파는 상인들.
6·25 전쟁은 공장과 상가 등 경제를 모두 파괴했다. 폐허가 된 시가지 한켠에서 천막을 친 채 생필품을 파는 상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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