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포고문·사람찾기’ 전쟁상 반영

1956년 1
월 1일자에 실
린 대전시내 시
공관, 대전극
장, 중도극장의
영화광고.
1956년 1 월 1일자에 실 린 대전시내 시 공관, 대전극 장, 중도극장의 영화광고.
신문에서 경제의 흐름을 한눈에 엿볼 수 있는 게 광고다. 식당이나 극장 광고에서 각종 상품 광고에 이르기까지 당대 경제의 온갖 표정이 담겨있다.

1950년과 51년초의 신문광고는 공고·고시문·포고문 등 전쟁 상황과 밀접한 정부와 지자체, 군부대의 광고가 대부분이었다. 51년 1.4 후퇴 직후에는 흩어진 가족과 친지를 찾는 심인(尋人) 광고가 홍수를 이뤘다.

본격적인 상업 광고는 51년 4월부터 등장한다. 호텔 성남장의 개업광고를 비롯 공주사범대의 학생모집, 충남여객의 충남도내 버스 운행 시간표 안내 등이 게재됐다.

52년 1월초 신년 광고에는 대동기계제작소·대전적십자병원·전신엽합대학·한국식산은행·대전초자·충남기계상회를 비롯 동아연필·남선기공·대전피혁 등이 전쟁 중에 건재함을 알렸다. 1월 5일자에 미락이 ‘진미낙원(眞味樂園)’, 6월 1일자에는 유락이 순일본식 요리를 내세우며 개업 광고를 게재했다.

대한주조가 금향(錦香), 조화주조(논산)가 조화(朝花)라는 주류를, 협창기업이 금강사이다를 출시했으며, 대창장류(현 진미식품)가 대창종곡사(種穀社)직매소를 함께 운영한다는 광고를 실었다. 52년 12월에는 한국산업은행이 대전시 중동 대전지점 개점 광고를 게재했다.

학생모집, 문중모임, 동창회, 군입대병 모집 광고 따위가 유달리 많은 것도 50년대 초·중반 광고계의 특이한 현상이었다.

53년 7월 정전협정 이후에는 벽돌·연와·유리·목재 등 건축 자재 광고가 급증했다. 파괴된 집과 건물, 공장 등의 재건과 복구가 이뤄지면서 수요가 급증했던 탓이다. ‘나왔다!’ ‘드디어 생산개시’라는 간단한 문구와 함께 판매장소만 알려도 물건이 없어 못팔던 시절이었다.

경제가 조금씩 틀이 잡히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극장과 식당·유흥업소 광고가 활성화되고, 약품과 주류, 의류업종 광고도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50년대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 게 극장광고였다. 시민관과 대전·중앙·대국극장 등은 일주일에 2-3회꼴로 영화 광고를 실었다. 겨울철 서민가정의 필수품이었던 연탄 생산 업체로 선광·대전·신흥·제일·대아연탄 등이 광고란에 자주 등장했다.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왼쪽부터 대전 시내
‘미락통’이란 거리이름
을 낳게 한 미락식당의
1952년 1월 5일자 광고, 간단한 그림과 문구
로 무궁화연필을 홍보한
동 아 연 필 주 식 회 사 의
1952년 10월 24일자
광고, 1955년 12월
30일자에 실린 대창장
유(현 진미식품)의 광고.
`왼쪽부터 대전 시내 ‘미락통’이란 거리이름 을 낳게 한 미락식당의 1952년 1월 5일자 광고, 간단한 그림과 문구 로 무궁화연필을 홍보한 동 아 연 필 주 식 회 사 의 1952년 10월 24일자 광고, 1955년 12월 30일자에 실린 대창장 유(현 진미식품)의 광고.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