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으면 쌀이라도… 도민들, 전쟁통 십시일반 ‘교육 기틀’

6·25 전쟁 때 충남도민들의 성금을 바탕으로 설립된 충남대의 1952년 개교 당시 모습. 1952년 5월 25일 설립 인가를 받고 6월 7일 개강식(개교 행사)을 가졌다.
6·25 전쟁 때 충남도민들의 성금을 바탕으로 설립된 충남대의 1952년 개교 당시 모습. 1952년 5월 25일 설립 인가를 받고 6월 7일 개강식(개교 행사)을 가졌다.
1951년 7월 26일자 대전일보에 ‘충남종합대학 태동’이란 기사가 실렸다. 6.25 전쟁 때 지역에서 일어난 큰 사건의 하나인 충남대학교 탄생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대전시재건위원회 교육분과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종합대 설립을 위한 기성회(期成會) 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는 내용이다. 위원장에 송진백(제헌국회의원), 위원으로는 변종구 김노원 주기영 김정일 전창을 한정갑 조덕윤 곽철 등이 선출됐다. 지역 종합대 설립을 위해 각계 인사들이 참여한 민간조직이 구성된 것이다. 재건위원회는 기성회에 모든 임무를 일임하고, 충남종합대와 전시연합대학 설치 운동을 함께 추진하기로 했다.

해방 이후 지역민들이 간절하게 염원한 것 중의 대학 설립이었다. 자녀들이 고등 교육을 받으려면 서울로 유학하는 게 유일한 길이었다. 서울대와 연희대 고려대 동국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중앙대 성균관대 등 대부분의 대학이 서울에 소재했다. 진학도 여의치 않았고 대학을 다니려면 학자금과 하숙비 등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다.

전쟁 때문에 서울권 대학들이 강의를 중단한 것도 충남대 설립에 주요한 동기를 제공했다. 학생들이 대부분 군에 입대하거나 남쪽으로 피란했기 때문에 기존의 대학들은 아예 문을 닫은 상황이었다. 충남대 탄생은 피란한 대학생들의 학업을 위해 전국 곳곳에 설치한 전시연합대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충남대와 대전전시연합대 설립이 동일한 사람들에 의해 동시에 추진됐던 것이다.


▲1953년 충남대학교 입학식 장면.

전시연합대학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교육제도다. 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한 학생들이 다른 대학에서 수강을 하거나, 여러 대학이 연합대학에서 함께 수업을 하도록 한 것이다. 1951년 5월 4일 문교부령 제19호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조치령’이 공포돼 전쟁 중에 대학교육이 이뤄지는 전무후무한 체제가 구축됐던 것이다.

대전에서도 전시연합대학이 등장했다. 대전일보 1951년 8월 21일자에 ‘전시연합대학 마침내 인가’라는 기사가 실렸다. 문리과 법과 경상과 3개 학과가 대전시내 초등학교 교실을 빌어 9월초에 개강한다는 내용이다. 문교부가 5백여명의 학생과 20여명의 교수를 확보한 점을 고려하여 대학 설립을 인가한 것이다. 대전전시연합대학은 대전시청 2층에 대학 임시사무소를 개설하고 9월 1일부터 등록을 받았다.

충남종합대학 설립은 매우 어렵게 이뤄졌다. 전쟁 중이라 자금을 모으는 것이 어려웠고, 교수와 학생들이 공부할 건물 마련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51년 12월부터 대학 설립이 본격 추진된다. 11월 23일 충남도내 시장·군수 경찰서장 회의에서 충남대설립기성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1월까지 10억원을 모으기로 한 것이다. 기존의 민간 기성회도 통합하여 회장에 이영진 충남지사, 부회장에 충남도 문교사회국장과 민간인 1인을 위촉하여 민·관이 함께 노력하기로 했다. 시·군에서는 시장 군수가 지부 회장, 경찰서장은 이사에 이름을 올렸고 지방 유지들도 속속 기성회에 참가했다. 대전시의 경우 손영도 시장이 지부 회장을 송진백, 김용성 등 행정 정치 경제계 인사가 이사를 맡았다.


▲1956년 제1회 학위수여식 모습.

기성회 모금운동은 범 도민적으로 전개됐다. 시·군별로 주민들에게 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홍보하는 한편 현금을 기부하거나 부득이한 경우 국채라도 내달라고 호소했다. 대전시내에서는 각 동(洞)별로 동민대회를 열고 시민들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기 위해 기성회 역원(役員)들이 해설대회(설명회)도 가졌다. 충남도민들은 돈이 없으면 쌀을 내는 등 십시일반으로 미래의 인재를 육성하는 일에 힘을 보탰다. 대전고등학교 학도호국단에서 20만원을 내놓고, 충남석유조합연합회도 500만원을 기탁했다. 지역 유지인 김두환(서산), 유승노(〃), 최병운(〃), 윤수권(〃), 문갑동(대전), 최한영(당진), 홍사철(〃)도 거액을 쾌척했다.

대전일보 1952년 4월 13일자에는 ‘충남대 마침내 정식 인가’라는 기사가 실렸다. 4월 10일 문교부 중앙교육위원회가 설립 인가를 결의해 5월초 개교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학과는 국문 영문 사학 철학 수학 물리 화학 7개 학과이고 학과별 정원은 40명이었다. 입학 원서는 충남도청내 충남대 교무국에서 접수하고 시험은 대흥초등학교에서 치러졌다. 충남대가 문을 열면서 대전전시연합대학이 해체됐다. 연합대는 충남도청 뒤 잠업취체소에 본부를 두고 법원 건물, 대흥초등학교로 옮아가며 수업을 해온 터였다. 일부 학생은 신설 충남대로, 나머지는 원래 소속 대학으로 복귀했다.

5월 25일 공식적으로 충남대 설립 인가가 이뤄지자 진헌식 지사가 초대 총장 서리, 전시연합대 학장이었던 민태식(전 서울대 교수)이 초대 학장 서리로 취임했다. 각계 인사와 도민들은 7월 6일 대전시공관에서 열린 도립 충남대 개강식에 대거 참석, 역사적인 지역대 탄생의 기쁨을 함께 누렸다. 충남대 설립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지역발전과 미래를 위해 대학을 세우겠다는 도민들의 의지와 동참이 이뤄낸 소중한 결실이었다.

<김재근 대전일보 60년사 편찬위원>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