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지식하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성질이 외곬으로 곧아 융통성이 없다’이다. 그래서 곧잘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비타협적인 사람을 부정적으로 표현할 때 쓰인다. 반대로 긍정적 의미로서 거짓이 없이 마음이 곧고 원칙에 충실한 사람에 대해 쓰이기도 한다. 후자의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사회는 무언가 잘못된 사회이다. 때로는 융통성이 지나치게 많이 허용되는 이 사회가 부모들의 눈에는 고지식한 자식이 살아가기에 너무나 험난하게 보인다. 그렇기에 규칙을 지켜가며 정직하게 살 것을 가르치기보다는 눈치 빠르고 요령 있게 살기를 주문하는 부모들이 늘어난다. 이는 우리의 잘못된 교육현실에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교육 본연의 가치보다는 ‘경쟁’과 ‘성적’이 궁극적인 목적인 것처럼 강조될 때 규칙과 원칙을 깨뜨리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나게 된다.

규칙파괴자(rule breaker)라는 용어는 원래 기업의 마케팅 전략에서 주로 사용된다. 즉 기업이 시장에서 새롭게 진입하여 기존의 우월적 지위를 갖고 있는 기업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규칙으로 경쟁하기보다는 규칙파괴자가 되어 경쟁자와 다른 게임을 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업이 아니라 사람 중에도 질적으로 뚜렷이 구분되는 두 종류의 규칙파괴자가 있다.

그중 하나의 규칙파괴자는 그 규칙을 통해 구현하려는 사회의 기본가치도 함께 파괴한다. 예로서 장애인 주차 규칙이 지켜지지 않는 아파트를 들어보자. 지상의 장애인 주차공간에는 언제나 장애인차량이 아닌 차량들로 점령되어 있다. 지하에 충분한 주차공간이 있고 경고표지판이 있는데도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다.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막무가내로 규칙을 어기는 한 사람 때문에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거주 장애인의 수에 비해 장애인 주차공간이 너무 많이 설치되었고 이는 잘못된 규칙이라는 논리를 편다. 이러한 규칙파괴자는 규칙 자체가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불합리하기 때문에 지킬 필요가 없다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킨다. 장애인을 위한 주차공간이 현재의 수요뿐만 아니라 그곳을 방문하거나 이사 올 것을 고려하고 있는 장애인들도 배려하기 위한 취지라는 점은 외면한다. 한 사람의 규칙파괴자로 인해 너도나도 그를 따르는 얌체 팔로워(follower)들이 나타나게 되고 마침내 그 규칙은 유명무실하게 되어 버린다. 문제는 그 규칙이 파괴되었을 때 그 규칙이 추구하는 가치도 함께 훼손된다는 점이다.

이와 다른 종류의 규칙파괴자는 규칙을 파괴함으로써 원칙을 지키고, 그 원칙이 담고 있는 기본가치를 지켜내는 사람이다. 미국의 로자 파크스(Rosa Parks) 여사가 그 예이다. 그녀는 1955년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에서 흑백분리버스의 유색인 석에 앉아 있다가 백인을 위해 자리를 비켜달라는 운전사의 요구를 거절하였다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주도한 버스승차거부운동을 촉발시켰고, 마침내 381일 만에 미 연방대법원으로부터 흑백분리버스는 불법이라는 판결을 받아내는 계기가 되었다. 한 연약한 여성의 용기 있는 규칙의 파괴가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실현시키는 역사적 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실제의 인물은 아니지만 요즈음 인기 드라마 ‘대물’에서 고현정이 연기하는 서혜림이라는 인물도 규칙파괴자이다. TV의 정책토론에서 국회폭력사태에 대한 입장을 밝히게 되는데,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치인들을 국민들이 채찍질하여야 한다고 눈물을 글썽이며 호소한다. 이 모습에서 많은 국민들이 감동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 눈물은 진심을 전달하는 극적 효과를 준다. 하지만 그녀가 공감을 얻는 것은 감성에 호소해서가 아니라 원칙에 호소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초선의원으로 당론에 반하는 투표를 하는 등 여러 번의 규칙파괴행위를 한다. 그것이 원칙을 지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원칙에 목말라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지식하고 바보처럼 원칙을 지키는 서혜림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원칙을 깨는 규칙파괴자들이 오히려 규칙을 만드는 룰메이커(rule maker)가 되는 현실에 사람들은 절망하게 된다. 우리는 교육에서부터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일부 고등학교 정문에 걸려 있는 A 대학에 몇 명, B 대학에 몇 명 합격이라는 현수막은 우리의 교육적 가치와 원칙이 얼마나 표류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융통성이 너무 많아 원칙을 훼손하는 저급한 규칙파괴자들은 이처럼 ‘효율’과 ‘경쟁’을 최우선 가치로 두는 교육풍토에서 양산된다. 이제는 학교가 고지식한 사람들을 키울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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