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협상장서 “김일성 잘있나”… 기개·열정의 열혈기자

1951년 7월 15일 개성 정전회담을 취재하는 유엔측 종군기자들. 종군기자는 군복에 군모, 군화를 착용한 채 현장을 누볐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제공
1951년 7월 15일 개성 정전회담을 취재하는 유엔측 종군기자들. 종군기자는 군복에 군모, 군화를 착용한 채 현장을 누볐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제공
“우리는 당신같은 반동적인 사람이 한놈도 없소.”

“여보 반동이라니!”

“이승만 정권을 찬양하는 자들이 반동이 아니고 무엇이오?”

“오! 우리의 열렬한 스탈린의 손자 따님이 바로 이 여성동무구만… 스탈린 할아버지의 훈장은 몇개나 땄소?”

“당신은 최악질분자요. 머지않아 단죄를 받을 것이요.”

“단죄를 받어? 저 쥐새끼 같은 계집애가 누구냐?”

대전일보 1951년 8월 18일자에 실린 ‘적과의 냉전 대담기’라는 기사의 일부다. 함재준 종군기자가 개성 봉래장에서 열린 정전협상을 취재하면서 북한의 관계자와 설전을 벌인 내용이다. 함 기자가 여성 소좌를 ‘군관동무’가 아닌 ‘아주머니’라고 부르면서 시비가 붙은 것이다. 전선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터라 정전협상 현장에도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6.25 전쟁 때 탄생한 대전일보에 창간 초기 함재준(咸在俊)이라는 뛰어난 기자가 등장한다. 독자들은 함 기자의 눈을 통해 화염과 피 냄새가 묻어있는 전쟁 기사를 생생하게 대할 수 있었다.

함 기자의 등장은 매우 극적이다. 1951년 1월 28일자에는 ‘재침 공비의 만행’이란 기사가 실려 있다. 인민군이 장악한 황해도 해주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함 기자의 체험담이었다. 대한통신사 기자였던 함재준은 인민군이 ‘반동분자’를 숙청하고 의용군을 징발하자 1950년 12월 23일 탈출에 나섰다. 방공호에서 밤을 지샌 그는 수류탄 2발을 들고 용당포로 가던 중 4명의 적에게 발각돼 공격을 받는다. 그러나 함 기자는 실탄 1발만 맞고 기적적으로 남행에 성공했다.

1.4후퇴 때 대전에 내려온 함재준은 치료를 끝낸 뒤 곧바로 대전일보에 입사, 종군기자로 나선다. 이미 국방부 종군기자였던 터라 물 만난 고기처럼 종횡무진 전선을 누비며 맹활약한다. 51년 2월 16일자 천안-서울 간 철도 복구 기사를 필두로 수많은 기사를 쏟아냈다.

함 기자는 아군의 역사적인 서울 재수복도 취재했다. 3월 14일 국군 1사단 선발대와 동행하여 중앙청에 태극기를 다시 꽂는 모습을 기사로 작성했다. 함 기자는 한강을 건너 서울에 처음 돌입한 부대가 1사단 8185부대 11중대이며 중대장은 대전 출신 김려진 대위라고 기록했다.

개성 재수복 상황을 전하고, 아군 1개 중대가 고랑포 전방 496고지에서 중공군 10만명을 격퇴한 전투도 취재했다. 항공편으로 대동강변 취라도로 날아가 평양의 외항인 진남포 상황을 전하고, 황해도 일원에서 큰 전과를 올린 유격대의 분전도 취재했다. 백령도 대청도 등 서해 도서의 피란민 11만명이 식량과 옷가지가 없어 고통을 겪는 사실도 전했다.


▲대전일보 함재준 기자가 북한측 인사들과 여러 차례 격렬한 논쟁을 벌인 개성 봉래장인근 유엔측 휴게소. 앞에 미군이 서있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제공

51년 10월 26일자 ‘금성시 공략 직전 전모’는 함 기자의 담대함이 물씬 느껴진다. 그는 금성시 공격을 앞두고 사단장과 함께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고지에 오른다. 진지 앞에서 사진을 찍는 순간 20여m 앞에 포탄이 떨어진다. 다행히 불발탄이라 무사했는 데 함 기자는 기사에 “사단장이 ‘쏴봐야 맞지도 않고 포격해고 불발탄 밖에 안되는 것이 현재 중공군의 무기입니다’라며 폭소했다”고 적었다.

함 기자는 정전협정 취재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협상 과정을 매우 충실하게 전했을 뿐 아니라 취재 현장 분위기를 주도했다. 북한측과 기싸움과 말싸움을 마다하지 않고, 장막 속에 갇혀 전황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북한 기자들을 통박했다. 유엔 기자단과 떨어져 홀로 북한측 기자 20-30명에 둘러싸여 있을 때도 전혀 주눅들지 않은 채 “기필코 북진통일할 것”이라거나 “김일성은 잘 있느냐?”며 신경을 건드렸다. ‘최악질분자’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북한측과 격론 때문에 함 기자 자신이 외신기자들의 취재 대상이 된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

정전협상 취재 과정에서 고향 후배와 친척을 만나기도 했다. 북한 관계자가 함기자의 고향이 황해도라는 사실을 알고 손목을 잡으며 월북을 권유하자 그는 “내 부모와 처자는 벌써 당신들이 죽였을 것”이라며 뿌리친다.

함 기자는 53년 7월 27일 정전협약 조인 때 대특종을 남긴다. 판문점 조인식은 유엔과 북한측 수석대표가 서명했고 한국측은 불참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한국대표에게 불참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유엔측 외신기자는 50여명이 조인식을 취재했지만 한국은 4명의 기자에게만 취재가 허용되고 30여명은 문산에서 대기했다. 함 기자는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판문점으로 달려가 역사적 현장을 취재했다.

함 기자는 최전선 전투현장과 빨치산 토벌 취재, 포로 인터뷰 등 다양한 기사를 남겼다. 대전 시공관에서 ‘종군기자 현지 보고 대강연회’ ‘개성회담 현지 보고 강연회’를 갖기도 했다.

함재준은 기자 정신이 몸에 밴 타고난 기자였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사선을 넘나든 열혈기자였다. 부모와 처자를 북한에 두고 내려온 아픔을 삭이며 기개와 담대함으로 전쟁터를 누빈 대한민국 대표 종군기자였다.

<김재근 대전일보 60년사편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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