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용·장경순·장명덕·구본건·최기덕·홍재현…

6.25 당시 대전일보에는 전쟁터를 뛰어다닌 기자가 여럿 있다. 큰 전투나 중요한 사안이 등장할 때마다 본사에서 기자를 증파하여 함 기자와 함께 취재활동을 벌였다.

1.4 후퇴로 천안까지 밀렸던 유엔군이 70일 만인 1951년 3월 14일 서울을 수복할 때는 3명의 기자가 동행 취재했다. 함재준 종군기자와 박태용 장경순 기자가 한강 이남에서 대기하다 국군 1사단 선발대를 따라 이날 오후 7시 5분에 중앙청에 도달한 것이다.

3명의 기자는 중앙청과 경무대, 국방부, 상공부 등은 온전하고 중구지역의 피해가 가장 심하다고 전했다. 서울시민들이 남루한 옷차림으로 꼬기꼬기 구겨진 태극기를 열렬히 흔들었으며, 쌀겨와 보리겨가 엄청나게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시내에 젊은 남자는 하나도 없으며 인구가 10만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적었다. 기자들은 군인들과 함께 서울시청에 붙어 있는 서울시 인민위원회라는 나무 간판을 직접 떼어내기도 했다.

51년 7월 정전협상이 시작될 때는 무려 3명의 기자가 경기도 문산에 증파됐다. 장명덕 구본건 최기덕 기자가 함재준 기자와 함께 역사적인 협상 개시를 취재한 것이다.

7월 10일자 기사는 유엔측 예비회담 대표단이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않은 채 심각한 표정으로 헬리콥터 2대에 분승, 안개낀 문산을 떠났다고 적었다.

53년 7월에는 홍재현 특파원이 일선 장병 위문단을 취재했다. 전쟁터로 나간 지역 출신 장병들을 위문하기 위해 대전시내 동장 40여명이 최전방을 방문한 것을 동행한 것이다.

홍 기자는 7월 4일자 기사에서 “갈수록 포 소리는 천지를 뒤흔들고, 달리는 우리 일행의 트럭 위로 핑! 핑! 탄환이 지나간다. 간담이 서늘해지고 무서워 서로가 손을 마주잡고 아이구머니 소리를 연발하면서…”라고 적었다.

대전일보 기자들은 이처럼 후방의 빨치산 토벌전은 물론이고 수시로 전방에 투입돼 사선을 넘나들며 중요한 전투 및 사건 현장을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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