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우 토론토 통신

최근 한국에서 토론토를 방문해 현지 한인천주교신자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실시한 황창연 신부님(수원교구)의 말씀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다. 신부님은 강원도 평창에서 환경친화적 생태마을을 운영하면서 감동적인 강론으로 유명하신 분이다.

신부님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 대해 말하면서, 자녀는 부모가 교육을 핑계로 자신에게 손찌검을 했을 경우, 특히 그것에 감정이 개입됐을 경우, 평생 잊지를 못한다고 했다. 부모가 평소 아무리 잘해줘도 그 기억은 별로 남지 않고 아팠던 기억만 주로 남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녀에게 아름다운 성장기억을 남겨주려면 우격다짐식의 권위주의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반면, 부모는 자식에게 잘해준 일만 기억날 뿐, 손찌검 등 잘못했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식에게 베푼 만큼 늙어서도 잘해주리라 은근히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늙어서 자식에게 제대로 대접받고 싶으면 어려서부터 자녀들을 자상하고 따뜻하게 보살펴야 한다.

자녀에겐 부모 중 특히 아버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어깨 위에 올라앉아 무등을 타본 어린이들은 어려서부터 이 세상에 대해 아버지의 어깨만큼이나 따스하고 듬직한 신뢰감을 갖게 된다. 아! 이 세상은 이처럼 따뜻하구나, 하면서….

그러나 예로부터 한국의 아버지들은 자식을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해 따스함이나 부드러움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엄부자친(嚴父慈親)이라 해서 아버지는 엄하고 권위적이어야 하며 어머니는 자애로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들의 아버지는 대개 범접하기 어려운 ‘무서운’ 존재였다. 무슨 일을 의논드리려 해도 쭈뼛거림이 앞섰던 것이다.

이젠 세상이 달라졌다. 지금 같은 시대에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권위만 내세우고 강압적으로 다루면 교육이 제대로 될 리도 없거니와 자칫하면 자식이 ‘적’으로 돌아설 우려마저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에는 부드럽고 인자한 아버지가 많아졌다. 예전 같으면 ‘좁쌀영감’ 소리를 들었을 터이지만 이제는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놀아주는 아버지가 많아졌다. 그런 아버지를 둔 어린이들은 자라서도 정 많고 따스한 성격을 갖게 될 것이다.

-권위주의로 자녀 키우기 옛말

-부드러운 리더십이 효과 더 커

부드러움이 능히 강함을 제압한다(유능제강-柔能制剛)는 말도 있거니와 부드러운 자녀교육이 효과가 훨씬 크다. 이곳 캐나다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자녀들과 함께 하키경기장을 찾는 등 친구처럼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다. 다만, 아직도 한인사회의 많은 아버지들은 그런 풍토에 익숙지 않은 모습도 눈에 띈다.

최근 서울의 한 중학생이 아버지의 꾸중에 앙심을 품고 집에 불을 질러 가족들을 모두 숨지게 했다는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평범한 학생으로 가정환경도 부유한 편이었던 그는 앞으로의 진로문제를 놓고 아버지와 갈등을 벌이다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판·검사 되길 바란 나머지 너무 강압적으로 대한 듯하다.

이 사건을 접하면서 지난 9월 한국축구 사상 최초로 국제축구연맹(FIFA) 주관 대회에서 우승한 17세 이하(U-17) 여자월드컵 대표팀을 이끈 최덕주 감독의 포근한 ‘아버지 리더십’이 떠올랐다. 최 감독은 평소 “축구는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즐기려고 하는 거란다”며 어린 소녀선수들을 다독거렸다.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의 호흡이 맞지 않거나 패스미스를 연발할 때도 고함 한 번 지르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소녀선수들은 감독의 눈치를 살피기보다는 서로 눈과 입을 바라보며 스스로 문제를 해결했다.

최 감독은 “아이들을 윽박지르고 체벌을 가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감독 눈치 보느라 주눅이 들면 창의적인 플레이가 나올 수 없다. 이기려고 임기응변에 강한 선수가 아니라 축구를 즐기면서 기본기를 착실히 다지는 선수로 키워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 여자축구의 환경을 극복하고 태극소녀들이 세계무대에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히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최 감독의 온화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시대의 아버지들이여. 이제 자녀에게 권위나 내세우려는 고리타분한 사고에서 벗어나 포근하고 부드러운 부정(父情)을 베풀어야겠다. 비록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며 자식농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한숨 쉴지언정 겉으로는 늘 부드러움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역할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긴 하지만.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중략)/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김현승 시 ‘아버지의 마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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