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둔산 근거 1300여명 대전·논산·금산 등 수시 출몰

6·25 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10일 충남 연기군 전의에서 미군에 붙잡힌 빨치산. 인민군의 남하에 호응, 교란작전을 벌이다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제공
6·25 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10일 충남 연기군 전의에서 미군에 붙잡힌 빨치산. 인민군의 남하에 호응, 교란작전을 벌이다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제공
“탕 탕 탕!”

1955년 1월 2일 오전 10시 천안군 환성면 청당리에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천안경찰서장은 “항복하라!”고 소리치며 병력을 움직여 퇴로를 차단했다. 적은 칼빈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지며 도주하려 안간힘을 썼다. 경찰이 2중 3중의 포위망을 편 채 화력을 집중하자 조용해졌다. 충남·충북·강원·경기도를 넘나들며 살인과 방화를 일삼았던 거물 빨치산 김종화가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체포되는 순간이었다.

김종화가 얼마나 유명했던지 천안 군민들은 40-50리 길을 걸어 경찰서로 구경을 왔다. 충남도경찰국은 유공자에게 10만원의 현상금을 지급하고 2계급 특진시켰다. 김종화는 54년 연기군 전의의 한 마을에 침투 수류탄을 터뜨려 주민들을 경악케 했고, 천안에서는 장날 대낮에 사직동 파출소를 습격하여 양민 2명을 사망케 했다. 김은 53년 7월 휴전 이후에도 경계가 취약한 도계(道界)를 신출귀몰 뚫고다니며 테러를 일삼았던 자였다.

조선인민유격대 혹은 공비로 불리는 빨치산은 5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전국 곳곳에 출몰하며 게릴라전을 벌였다. 군경이나 관공서를 습격하여 전선을 혼란케 하고 민심을 교란했으며 지방의 유지와 우익인사를 잡아다 숙청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 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인민군들이 속속 산에 들어가 빨치산 대열이 합류했다.

빨치산 하면 으레 지리산을 떠올리지만 충청권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백산맥의 월악, 속리, 대둔, 백암, 덕유, 운장, 회문, 지리산이 이르는 험한 산줄기는 은신과 도주가 용이한 빨치산의 소굴이었다. 충남 논산과 금산, 충북 충주와 옥천 영동의 산간 오지는 낮에는 아군, 밤에는 빨치산 세상이 펼쳐졌다. 빨치산은 수십명 혹은 수백명 단위로 게릴라전을 벌이고 농가의 음식과 의류 따위를 빼앗아가는 보급투쟁을 벌였다. 한참 세력이 강할 때는 도시를 공격하고 열차를 전복시키는 대담한 일도 서슴지않았다.

충청권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951년 5월 26일 청주 습격이었다. 새벽 3시 청주시내에 진입한 빨치산은 충북도청과 형무소, 언론사 건물에 불을 지르고 공격했다. 도청 일부 건물이 불타고 형무소가 파괴되는 등 피해액이 30억원에 달했고 형무소가 파괴돼 수감중이던 133명 중 127명을 탈옥했다. 이중 대부분이 체포되거나 귀순했지만 32명은 빨치산을 따라 입산했다.

경찰이 영동까지 추격하여 38명을 사살했지만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60여명의 빨치산이 형무소를 습격한 뒤 400여명의 경찰관이 있는 시내를 유유히 행진했던 것이다. 청주사건은 국회에서도 문제가 됐고 충북경찰국장과 경무과장, 청주경찰서장이 사표를 제출했다.

충남과 전북에 걸쳐있는 대둔산은 빨치산의 아성이었다. 대전일보 1951년 6월 28일자에는 대둔산 일원에 한듬산·313·나팔·해방·압록강·느티골 부대와 군단사령부·공병대 등 1300여명이 빨치산이 있으며 이중 1/3이 무장했다고 실려있다. 이들은 남로당 충남도당에 소속돼 인근 논산, 금산, 서천, 완주, 익산 등을 넘나들며 투쟁을 벌였다. 군경은 50년 9.28 이후 이듬해 6월말까지 양촌· 벌곡지구에서만 사살 2백여명, 생포 7백여명의 전과를 거뒀다.

그러나 빨치산은 치고빠지는 게릴라 전술로 논산 양촌과 강경에 출몰하고 서천 판교면도 습격했다. 52년 1월에는 대전경찰서가 남로당 충남도당 위원장 남충열의 지령을 받아 기밀을 탐지하던 기재수 일당을 검거했다. 남부군 1000명, 충남지구 600명, 지리산 빨치산 400명과 합세해 대전을 습격하기 위한 정보를 수집하다 부사동에서 붙잡힌 것이다.

충북에서도 51년 10월 빨치산들이 옥천시내를 기습, 경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52년 8월에는 영동읍내를 습격 읍사무소와 학교강당, 한청사무실, 부용파출소를 불태웠다. 11월에는 빨치산 3명이 충주시내에 침투하여 군청사에 불을 질러 전소시켰다.

빨치산에 맞서 군경은 치열하고 집요한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사방에서 대둔산을 포위한 뒤 포위망을 좁혀 중국에는 적의 비트와 토치카, 지휘부까지 장악했다. 51년 9월 강경경찰은 3백명의 공비와 전투를 벌여 53명을 사살했다. 옥천 시내 피습 직후 충북·충남·전북경찰은 합동작전을 벌여 전북 운장산 일대에서 사살 187명, 포로 8명, 납치자 구출 100여명의 전과를 올렸다.

남한의 빨치산은 91년 11월부터 백선엽장군이 지휘하는 백야전투사령부의 대대적인 토벌로 3000명으로 줄었고, 53년 7월에는 1000명으로 격감했다. 55년 4월 지리산 입산금지 해제를 함으로써 그 존재가 사실상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 충청권에서도 이무렵 자취를 감췄다.

빨치산은 비록 적은 숫자지만 수시로 출몰하여 군경과 전투를 벌이고 관공서를 습격하여 엄청난 혼란과 불안감을 조성했다. 산간 오지의 농민들은 늘 약탈의 공포에 시달리며 농사를 지어야 했고, 군경도 토벌작전을 하면서 적지 않은 희생을 치렀다. 산 속에서 굶주림과 추위, 죽음의 공포에 떨며 짐승처럼 연명했던 빨치산 자신도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참혹한 희생자였다. <김재근 대전일보 60년사편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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