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답설야중거 불수호난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라는 뜻을 담고 있어 백범 선생이 애송한 이 시는 서산대사의 자작시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산 역사인 백범 김구 주석은 이 시를 친필 휘호로 써서 소중한 지인들에게 전하곤 하였다. 위기에 처한 국가 지도자로서, 짧고 간결하되 확고부동하게 함축된 공직관 또는 국가관을 이 시를 통해서 자각하고 전파하기 위함이었으리라.

경찰의 날(21일)을 하루 앞두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경찰청장’이었던 백범 김구 선생의 ‘경찰관’을 타산지석 삼아 살펴보고자 한다. 청년의 때에 남다른 정의감을 가지고 동학혁명군 선봉대에 가담한 것을 계기로 안중근 의사 선친의 보살핌을 받았던 백범은 일본국 현역 장교를 명성황후 시해범으로 간주하고 맨손으로 처단하며 일약 전국적 명사가 되었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고종의 특사로 구사일생하여 안창호 선생 등과의 교육계몽운동에 동참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게 된 백범은 학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창호 선생을 위시한 임정요인들은 백범을 임시정부 초대 행정자치부장관에 기용하고자 뜻을 모았으나 백범의 완강한 고사로 허사가 되었다. 백범이 끝내 고사한 행정자치부장관직은 안창호 선생 몫. 대신 백범은 자신보다 두 살이나 아래인 안창호 선생의 강권에 의해 초대경찰청장(경무국장)직을 맡았던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경찰행정은 각별한 신뢰 속에서 구축된 ‘안창호-김구’ 라인으로 임시정부의 대들보 역할을 해야 했다. 눈 덮인 광야를 걷듯 공직수행을 하며 백범이 가슴에 새겼던 좌우명은 ‘先公後私’! 산후조리를 못 해 사랑하는 조강지처가 죽어가는 순간과 조금만 타협하면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해방 후에는 물론, 안두희의 흉탄에 암살되는 최후의 순간까지 백범은 이 화두를 놓지 않았다. 국가 지도자로서 백범이 푯대로 삼았던 다른 하나는 “내가 곧 대한민국이다”라는 국가관이었다. 토머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설파한 바 있듯이 국가는 ‘만인의 만인 상호간의 투쟁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계약의 산물’인지라 구체적 실체가 없다. 주권자인 국민은 자신이 처한 현안과 관련하여 마주하는 공직자를 통해서 국가의 실존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개 국민을 민원 현장에서 대하는 공직자들은 ‘내가 곧 대한민국이다’라는 국가관을 가지고 민원인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 백범의 확고한 공직관이었다. 그 덕분일까? 세계적 수준의 백범기념관과 함께 백범은 남북을 넘어 세계 한인 동포들의 가슴에 영원한 사표로 간직되고 있다. 묵묵히 소임을 다하고 있는 지배적 다수의 경찰관들에게 허탈감과 분노를 안겨주는 경찰관 비리 관련 기사가 끊이지 않고 있다. 경찰은 ‘국민의 존엄하고 행복한 삶과 재산 보호’라는 국가 기능을 그 어떤 공조직보다 맨 앞에서 수행하는 조직이다. 범인을 잡기 위해 출동하는 경찰관들은 물론 번화가에서 교통 수신호를 보내고 있는 교통경찰 한 명, 한 명이 곧 ‘대한민국’인 것이다. 그러한 만큼 경찰에 대한 불신 또는 신뢰는 곧 국가에 대한 것으로 귀결된다. 이 시점에서 경찰 조직 수뇌부가 전국 경찰을 대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경찰청장 김구 선생의 공직관’에 대한 창조적 재조명 작업과 ‘On-Off라인 교육’을 병행함으로써, 경찰 조직의 내부적 자존감과 국민적 신뢰를 함께 끌어올리는 계기로 삼으면 어떨까? 이러한 가운데서 경찰에 대한 처우증진과 양질의 인력 확보를 위한 경찰관 채용 제도의 개편이 뒤따른다면 더 좋을 것임은 물론이다.

홍원식(경찰보안연수원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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