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전쟁 중의 선거바람

1952년 지방선거에서 압승한 친 이승만계 지방의회 의원들이 국회 해산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정부기록사진집
1952년 지방선거에서 압승한 친 이승만계 지방의회 의원들이 국회 해산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정부기록사진집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1952년 새해초 지역에 때아닌 선거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충남의 공주·연기·서산 3곳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윤치영, 조병옥, 김준연 등 정계의 거물들이 잇따라 출사표를 낸 것이다. 국회의원 보선, 지방자치 선거(2회), 대통령 선거 등 그해 4번이나 치러진 선거전의 시작이었다.

2월초 실시된 전국 8곳의 보선 가운데 3곳이 충남이었고 그중에서도 공주가 가장 치열했다. 장관을 지낸 윤치영이 국민당, 조병옥이 민국당으로 각각 출마했기 때문이다. 윤치영은 공주와 전혀 연고가 없었고, 조병옥은 공주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는 점을 강조했다. 두 후보는 공주의 작은 마을까지 누비며 치열한 유세전을 벌였다. 선거 결과 윤치영이 1만4793표로 조병옥(8550표)을 큰 차이로 눌렀다.

연기에 출마한 김준연은 서울시장과 변호사회 회장을 지낸 무소속 이범승과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김준연은 동아일보 사장과 법무부 장관을 지낸 인물이었지만 지역에 연고가 없었다. 김준연은 당선자인 이범승의 절반에도 못미쳐 낙선했다.

52년 선거의 압권은 최초의 지방자치선거였다. 1949년 7월 지방자치법 제정됐지만 6.25 전쟁 발발로 선거가 연기된 터였다. 이승만은 52년 1월 국회에서 대통령 직선, 상하 양원제 도입을 골자로 한 개헌안이 부결되자 돌연 지방자치 선거를 꺼내들었다. 현행대로 국회에서 대통령을 뽑으면 자신이 재선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4월 25일 먼저 실시된 게 시·읍·면의원 선거였다. 559개 투표소에서 2188명의 시·읍·면의원을 뽑는 충남에서는 4577명이 등록, 2대 1을 약간 넘었다. 당선자는 무소속이 1030명으로 가장 많았고 자유당, 대한청년단, 독립촉성국민회, 민주국민당 순으로 나타났다. 자유당과 청년단, 국민회 모두 친 이승만 정당이었고 무소속에도 이 대통령 추종세력이 많았다.

시·읍·면의원들은 원구성을 마치자 단체장, 교육위원 등을 뽑았다. 대전시의회는 대전일보 사장을 지낸 임지호 의원을 의장으로 뽑고 시장은 손영도 현 시장을 선출했다. 교육위원으로 곽철, 송진백, 정훈 등 10명을 선출했다. 군(郡) 지역에서도 면의회 읍의회가 면장과 읍장, 교육위원을 각각 선출했다.

기초의원들에 의해 뽑힌 교육의원들은 교육위원회를 구성하고, 교육자치를 시작했다. 교육위 의장은 당연직으로 시장과 군수가 맡았고, 부의장은 교육위원 중에서 선출했다. 위원들은 교육계의 지대한 관심 속에 교육감을 뽑았다. 대전시 초대 교육감은 홍재은, 대덕 진상구, 홍성 권중록, 서천 박재옥 등이 당선됐다. 교육위는 시·군별로 1명씩 도교육위원도 뽑았다.

제도가 미흡한 탓으로 대전의 동장 선출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읍·면장은 읍·면의회에서 뽑았지만 동의원과 동장은 선출 규정이 아예 없었다. 시장이 임기가 만료된 동장을 임명하는 것을 싸고 논란이 야기되는 등 갈등과 혼란이 빚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결원 지역만 새로 뽑는 방법으로 5월 31일 동장 선거가 이뤄졌다.

도의원 선거는 5월 10일 치러졌다. 충남지역 정원 42명에 127명이 등록했는데 투표 결과 자유당 23, 무소속 11, 국민회 3, 한청 4, 국민당 1명이 당선됐다. 역시 자유당과 친 이승만계가 압승한 것이다.

지방선거가 끝나자 예상대로 이승만은 공세를 강화했다. 충남도의회 등은 앞 다퉈 국회 해산과 대통령 직접선거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전국 곳곳에서 지방의회와 친 이승만 조직이 대통령 직선 등을 요구하는 궐기대회를 열었다.

이승만은 승세를 타고 국회를 해산하겠다며 계속 압박했고, 마침내 7월 4일 부산에서 국회를 열어 대통령 직선제와 내각책임제를 짜깁기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군과 경찰이 의사당을 포위하고 기립표결을 강행한 끝에 찬성 163, 반대 0, 기권 3표로 가결에 성공한 것이다.

2대 대통령 선거는 7월 7일 개정헌법 공포에 이어 8월 5일 치러졌다. 야당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일사천리로 진행한 것이다. 이승만은 523만 8769표(74.6%)로 당선됐고 2위인 조봉암은 79만 7504표에 그쳤다.

1952년은 전쟁과 선거가 공존한 해였다. 전선에서는 전투가 벌어져 피를 흘리고 후방에서는 공비가 출몰하는 상황에서 4번이나 선거가 치러졌다. 지방자치 선거가 처음 실시됐지만 여전히 서울시장과 도지사는 대통령이, 군수는 도지사가 임명하는 기형적 구조였다. 동장 선거가 추가로 실시되고 기초의원들에 의해 선출된 교육위원들 스스로 임기를 2년짜리와 4년짜리로 나누는 일도 해야 했다. 의원들이 이권과 부정에 개입하고, 자신들이 선출한 단체장을 불신임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전쟁 중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채 정략적으로 전격 실시한 지방자치는 오랜 세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김재근 대전일보 60년사 편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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