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를 대전에” 1951년 건의안 국회통과… 정부서 미뤄

부산으로 피란한 이승만 정부는 경남도청 등에서 국정을 수행했다. 당시 문교부, 보건부, 부산시선관위, 고시위원회가 함께 입주한 부산시내 건물. 정부기록사진집
부산으로 피란한 이승만 정부는 경남도청 등에서 국정을 수행했다. 당시 문교부, 보건부, 부산시선관위, 고시위원회가 함께 입주한 부산시내 건물. 정부기록사진집
1951년 3월 중순 대전은 갑작스런 천도(遷都)설에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부산에 위치한 임시정부가 대전으로 옮긴다는 것이었다. 중공군 개입으로 서울을 내주고 후퇴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다시 서울을 수복할 무렵이었다. 대전일보는 3월 15일자 ‘중앙정부는 대전에?’라는 기사에서 말로만 떠돌던 수도이전을 공식적으로 다뤘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실무적인 선에서 이전을 검토하던 상황이었다.

정부는 6.25 전쟁이 발발한 지 이틀만인 1950년 6월 27일 서울을 떠나 대전-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이전했고,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여 서울을 수복하자 곧바로 환도했다. 그러나 이듬해 1월 1.4후퇴 때 다시 부산으로 피란한 바 있었다.

51년 3월 전황이 호전되자 부산의 정부를 조금 더 북쪽으로 옮겨야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이영진 충남지사는 정부에 교통의 요지이자 지리적 중심지인 대전으로 수도를 옮기자고 건의했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이 대통령은 전규홍 총무처장을 대전으로 보냈다. 전 처장은 대전시내 곳곳를 돌아다니며 주요건물을 파악하고 제반 조건을 조사했다. 손영도 대전시장도 부산의 중앙부처와 국회를 방문, 대전이 수도의 역할을 능히 수행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해 천도문제는 다소 복잡하고 지리하게 전개됐다. 아군이 서울을 수복하고 북상하자 정부는 선발대를 서울로 보내 이전 가능성을 점검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관들은 전선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섣불리 수도를 이전하는 것은 좋지 않다며 서울 환도를 반대했다. 맥아더 사령관도 “현명한 방책이 아니다”고 충고하면서 일부 부처만 옮기는 방안도 등장했다.


▲중앙정부 대전 이전설을 처음 보도한 대전일보 1951년 3월 15일자 기사.

잠잠하던 수도이전은 전황이 호전되고 51년말 국회가 대전천도를 의결하면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11월 15일 천안 출신 김용화 의원 외 58명이 제출한 ‘대전 임시천도에 관한 대정부 건의안’을 전격적으로 의결한 것이다. 국회는 1차 표결에서 미결(未決)되자 정부측 의견 청취와 의원 찬반 토론을 거쳤다. 한동석 총무처장은 “제반 생활조건과 관련 여러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당분간 천도는 곤란하다”고 주장하자 백남식 의원은 “대통령이 의원 다수가 원하면 옮기는 것이 무방하다고 밝혔고, 미 8군도 대전 임시천도는 군사상 하등 지장이 없다고 밝혔다”고 반박했다. 표결 결과 재석 116명 중 찬성 60, 반대 32표로 가결이 이뤄졌다.

건의안이 통과되자 대전은 한껏 고무됐다. 충남 지사와 대전 시장은 “대(大) 대전은 입지조건이 구비됐다”며 환영의 뜻을 표했다. 손 시장은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정부기관 수용에 다소 미흡하지만 시민과 더불어 간난신고를 같이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밝혔다. 결의안을 주도한 김용화의원은 “국회가 민의를 반영하여 의결한 만큼 정부도 무시하지 못할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대전일보 1951년 11월 17일자에 실린 ‘대전 임시천도 대정부 건의안’ 국회 통과 관련 기사.

대전시내 경제도 꿈틀거렸다. 불과 며칠 사이에 각종 물가가 10~20% 오르고 집값도 급등했다. 전쟁으로 파괴된 뒤 재건축이 지지부진했던 인동시장은 점포 쟁탈전이 벌어졌다. 부산으로 피란하여 장사를 하던 서울 상인들이 대전지역 상가 매입 경쟁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대전의 선남선녀들이 최고 결혼 상대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대전 천도는 성사되지 못했다. 허정 총리 서리는 “서울 환도 가능성이 높아가는 마당에 대전으로 이전하면 혼란과 낭비가 초래될 것”이라고 주장했고, 정부도 국무회의 통과 절차를 미뤘다. 무엇보다 이승만 대통령과 공무원들이 총소리가 안들리는 부산을 선호했다. 대전이 아닌 수원이나 영등포로 천도하자는 등 무책임한 논의만 무성했다.

부산 임시정부는 1953년 7월 1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뒤 8월 15일 서울로 환도했다. 51년 여름부터 전선이 38선 부근에 고착돼 대전이나 서울로 옮기는 것이 당연했지만 대통령과 고위 공무원들은 한사코 부산을 고집했다. 군인이나 국민이야 어떻게 되건 말건 전쟁과 멀리 떨어진 부산에서 안전과 편안을 누리겠다는 이기심이 충만했던 것이다.

<김재근 대전일보 60년사 편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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