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7월… 전쟁 초기 분수령 ‘대전전투’

미 24사단 병사들이 대전시내에서 인민군 저격병의 공격에 응사하며 시가전을 벌이고 있다.1950년 7월 20일.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미 24사단 병사들이 대전시내에서 인민군 저격병의 공격에 응사하며 시가전을 벌이고 있다.1950년 7월 20일.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적의 T34 전차를 저지할 화력이 없음. 3.5인치 로켓포 속히 공수 바람!”

1950년 7월초 대전 충남도청 3층에 지휘소를 차린 미 24사단장 딘 소장은 맥아더 장군에게 긴급 통신을 날렸다. 전쟁이 시작되자 최초로 한국 전선에 들어온 24사단 예하 스미스부대와 34연대가 오산 평택 천안 등에서 잇따라 패배한 터였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대전-대구-부산에 이르는 경부 축(軸)에 최정예인 1군단의 3, 4사단과 2사단, 105, 107, 203 전차여단을 투입했다. 이들은 전차를 앞세워 천안시내 미군 방어선을 유린하고 34연대장 마틴 대령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딘 소장은 연기군 전의와 조치원에 저지선을 편 뒤 4일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인민군은 미군의 포병 및 공중폭격으로 큰 타격을 입었지만 주공을 3사단에서 4사단으로 교체하는 강수를 둬 기어코 조치원 일대를 장악했다. 미군은 다시 금강 남쪽에 방어전을 펼쳤지만 적의 강력한 공세에 밀려 7월 16일 밤부터 철수를 시작했다. 사정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18일 대전을 방문, 딘 소장에게 ‘20일까지 대전 사수’를 명령했다. 미국의 주력 전투부대가 한반도에 들어와 전선에 배치되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대전을 긴급 방문한 워커 사령관(왼쪽)은 딘 소장(오른쪽)에게 `20일까지 대전을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딘 소장은 대전 방어의 중책을 34연대에 맡겼다. 19·21연대는 잇따른 패배로 전투력이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부임 이틀째인 34연대장 뷰챔프 대령은 대전비행장(현재 둔산동)에 캠프를 두고 월평산성(상수도사업본부 부근)과 남선공원에 1개 대대씩 배치했다. 서남쪽 논산에서 들어오는 가수원과 동북쪽 신탄진을 지나 남하하는 오정동에도 소규모 병력을 보냈다. 갑천을 거점으로 대전 도심 진입을 막자는 것이었다.

7월 19일 새벽부터 적은 T34 전차를 앞세워 밀고 들어왔다. 인민군 4사단 5연대는 대대적인 포격을 퍼부은 뒤 107전차여단과 함께 갑천을 건너 월평산성의 미군 저항선을 돌파하고 비행장으로 진입했다. 연대장이 직접 3.5인치 로켓포를 쏘아 적 전차를 파괴하는 등 어렵게 진지를 사수했다. 병력이 적은 서남쪽도 상황이 급박했다. 논산에서 진입한 인민군 4사단 16연대는 1개 소대가 주둔 중인 가수원을 돌파하고 갑천을 건너 정림동 고개로 진입을 시도했다. 미군은 1개 대대를 급히 보내 도솔산 고지를 점령한 뒤 정림동 고개에서 적을 격퇴했다.

가장 심각한 것은 퇴로가 막혔다는 점이었다. 인민군 4사단 18연대는 경무장한 병력으로 보문산을 우회하여 대전에서 남쪽으로 빠지는 금산과 옥천의 도로를 장악했다. 말 그대로 미군은 사방이 포위된 형국이었다.

20일 미 24사단은 대전시내 일원에서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이날 새벽 인민군은 전차를 앞세워 유성-대전 도로로 들어섰다. 비행장의 연대본부를 유린한 뒤 수침교를 건너 시가지로 향하자 미군은 3.5인치로 대응했다. 적의 전차 2대 파괴됐지만 일부는 시내로 진입, 시내를 휘젓고 다녔다. 서남쪽을 방어하던 미군도 밤새 전투를 펼쳤지만 이날 오전 정림동 고개를 내줬다.


▲미 24사단이 대전전투에서 패배하고 철수한 1950년 7월 20일 대전역. 역 광장에는 군인과 경찰, 미군과 일반 시민이 뒤섞여 있고 뒷편에 시커먼 화염이 보인다.

오후 들어 인민군은 시내 곳곳에 출현했다. 13시경 충남도청 앞에서 적 전차를 목격한 딘 소장은 직접 지프차를 타고 추격, 3.5인치로 명중시켰다. 이날 미군은 모두 10대의 전차를 파괴했다. 그러나 인민군은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으로 대전시내 전역을 속속 수중에 넣었다. 곳곳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고 화염이 치솟았다. 미군은 모든 화력을 퍼붓고 항공지원까지 동원했지만 통신과 연락망이 두절돼 전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미군은 후퇴 과정에서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남동쪽으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판암동과 세천터널을 장악한 적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금산쪽 도로를 경유한 철수도 인민군 매복에 걸려 길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19-20일 치러진 대전전투에서 미군은 3933명 중 전사 48명, 실종 874명, 부상 228명 등 1150명의 손실을 입고 전투장비도 65%나 잃었다. 딘 소장도 포로가 돼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대전전투는 아군에 희망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미군의 본격적인 참전은 국군의 사기를 높였고, 일패도지하던 아군이 전력을 재편성하고 제1군단을 창설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미 제1기병사단과 25사단이 투입돼 낙동강에 저지선을 펴도록 시간을 벌어줬다. 미군의 강력한 저항은 인민군에게도 큰 충격을 줘 작전의 과감성을 현저하게 떨어지게 했다.<김재근 본사 60년사편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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