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으로 몰려든 피란민 궁핍한 삶

6·25 당시 대전과 부산 등 대도시 외곽에 속속 들어선 난민촌(위) 전경과 1951년 3월 구호양곡을 타기 위해 기다리는 난민들 모습.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제공
6·25 당시 대전과 부산 등 대도시 외곽에 속속 들어선 난민촌(위) 전경과 1951년 3월 구호양곡을 타기 위해 기다리는 난민들 모습.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제공
‘본도(本道) 수용 재민(災民) 15만명’ ‘피란민은 호남으로’

대전일보 1951년 1월 18일자에 실린 기사들이다. 중공군 개입으로 이른바 ‘1.4후퇴’가 이뤄질 무렵의 혼란과 급박함이 물씬 풍기는 기록이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전투에 참가한 군인이지만 백성들도 엄청난 고통을 겪는다. 6.25 전쟁은 수백만 명이 피란길로 내몰렸고, 피란을 가지 않은 사람들도 집이 불타고 먹을 게 없어 생사를 넘나들 수 밖에 없었다.

6.25 전쟁 때 피란민이 가장 많이 몰려든 곳의 하나가 대전이다. 영호남으로 빠지는 교통의 요지라 북한과 서울· 경기도에서 난민이 쇄도했다. 51년 1월 6일자 대전일보에는 ‘피란민 각군(各郡) 할당 수용’이란 기사가 실렸다. 대전시내 수용소가 넘쳐 논산 2만, 공주 2만, 부여 1만명 등 충남도내 22개 수용소에 5만3000명을 분산 배치했다는 것이다. 난민이 날이 갈수록 늘어 15만명에 이르자 피란민에게 호남 방면으로 내려가라고 호소하게 된다.

피란민과 전재민(戰災民)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먹는 문제였다. 식량 거래가 끊겼고, 이렇다할 구호체계가 있을 리 만무했다. 대전역 주변에는 굶거나 얼어 죽는 피란민이 속출했다.

대전일보는 1950년 12월부터 피란민 돕기에 나선다. 31일자 ‘구하자! 불쌍한 우리 이재(罹災)동포’에서는 “피란 화차(貨車) 꼭대기에서 웅크린 할아버지와 어린아이, 수용소 가마니 위에서 제대로 입지도 못한 채 누워있는 할머니도 모두 단군의 피를 이어받은 동포”라며 “한 술의 밥도 나눠 먹고 한 칸의 방도 나눠 쓰자”고 호소했다.

급박한 상황과 맞물려 쌀값이 걷잡을 수 없이 올랐다. 대 1두(斗)가 50년 12월 21일 7000원, 이듬해 2월 16일 1만1600원, 3월 12일에는 1만3400원으로 올랐다. 전쟁으로 51년 농사에 차질이 빚어지자 52년 6월에는 13만원까지 폭등했다.

아사자 동사자가 속출하자 정부는 피란민과 전재민에게 쌀을 배급하고 빈집에 살 수 있도록 강제력을 발동했다. 대전일보 2월 17일자에는 대전시내 원주(原住) 전재민 5만5000명과 외래(外來) 피란민 6만5000명에게 1일 3홉의 구호미를 배급한다고 나와 있다. 쌀을 실은 우마차는 특별히 국도 통과와 대전시내 진입을 허가했다. 터무니없이 쌀값을 올려 받는 간상배(奸商輩)에 대한 단속도 실시했다. 전쟁으로 중단됐던 추곡(벼) 수매를 독려하고 담배와 면화(綿花) 매상도 재개했다.

거주할 곳이 없는 사람을 위해 적산(敵産 : 일제의 재산) 가옥에 임대료 없이 난민을 수용토록 했다. 대전시내 곳곳에 미국 원조 물품으로 천막이 들어서고, 얼기설기 판자집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백미를 실은 우마차의 국도 통과와 대전시내 진입을 허가한 충남계엄 민사부장 명의의 고시문. 대전일보 1951년 2월12일자.

전선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백성들은 극한의 고통을 겪었지만 제멋대로 먹고 마시고 즐기는 부류는 여전했다. 식량을 축내는 밀주(密酒)와 떡, 엿을 단속하고 일체 압수하는 강경책을 썼지만 근절되지 않았다. 51년말부터 대전 시내 곳곳에 다방과 술집이 등장하고 고급요정이 속속 장사를 재개했다. 유곽이 출현하여 아가씨를 둔 채 영업을 하고 댄서를 모집하는 신문광고도 실렸다. 극장에서는 영화가 상영되고 악극도 공연됐다. 가수 선발 콩쿨대회는 참가자가 많아 며칠씩 진행됐다.

재미있는 것은 대전일보 1951년 2월 7일자에 실린 ‘서울 물가는 살인적’이라는 기사다. 피란민의 입을 빌어 북한군이 점령 중인 서울의 상황을 전한 것으로 서울시내 쌀값이 대 1두에 4만4000원까지 올랐으며, 공산군 군표 100원과 한국은행권 2000원이 맞교환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한쪽에서는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구걸까지 하며 몸부림치고, 한켠에서는 주지육림에 댄서까지 동원해 춤판을 벌였다. 백성들은 쌀과 옷가지를 사기 위해 인민군 군표와 남한 정부가 발행한 화폐를 스스럼 없이 바꿨다. 전쟁은 참혹한 모습으로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살아남은 인간의 삶은 고통과 모순인 뒤섞인 채 질기게 이어졌다. <김재근 본사 60년사 편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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