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수 前 황해도민회 부회장

6·25 당시 피란민들의 힘들었던 삶을 회고하는 김형수 전 황해도민회 부회장. 빈운용 기자 photobin@daejonilbo.com
6·25 당시 피란민들의 힘들었던 삶을 회고하는 김형수 전 황해도민회 부회장. 빈운용 기자 photobin@daejonilbo.com
“1.4후퇴 때 옹진과 연평도를 거쳐 남으로 내려왔다. 목숨을 건지기 위해 적수공권으로 허겁지겁 집을 떠났다.”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대전에 정착한 김형수 전 대전시 황해도민회 수석부회장(86)은 6.25 당시 궁핍했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북한에서 내려온 피란민 대부분이 먹을 것이 없고 집도 없어 생사의 기로를 헤맸으며 정부에서 지급하는 구호미에 의존해 생명을 부지했다고 밝혔다.

“대전에 피란민이 넘치니까 충남도내 시·군에 분산 수용했다. 교회 같은 곳에 거주하거나 한쪽에 집단으로 천막을 치고 삶을 꾸려나갔다.”

김씨는 제2국민병으로 공비 토벌작전에 참가, 이리(익산), 남원, 산청을 거쳐 지리산에 갔었고, 51년 7월부터 경찰에 입문했다.

“강경 경찰서에서 근무할 때 그곳에 두부공장이 있었는데 비지를 얻어먹기 위해 아침마다 수백 명의 피란민이 몰려드는 것을 봤다. 공장 주인이 처음에는 돈을 받고 팔다가 하도 불쌍하니까 매일 그냥 나눠줬다.”

전쟁 중에 공직(경찰)에 있어 그래도 남들보다 형편이 조금 나았다는 김씨는 피란민들이 쓰레기통을 뒤지고 구걸을 하는 게 흔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전선이 조금 안정되면서 미국에서 구호물자가 와서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사람이 줄었다. 미국에서 보내 헌 옷가지를 줄여 입고 밀로 죽을 쑤어먹었다.”

북한 출신의 피란민들이 대전에 대거 정착한 사연도 잘 기억했다.

"먹고 살 게 없으니까 중앙시장에서 미국에서 온 옷을 줄여 팔고, 쌀과 생선 채소 따위를 거래하기 시작했다. 워낙 드세고 억척스럽게 일한 탓으로 이내 자리를 잡았고 사업을 해서 큰 돈을 번 사람도 여럿 있다. 한때 중앙시장 상권의 70~80%를 이북 출신들이 좌우했다.”

김씨는 6.25 당시 충청도 사람들이 아무조건 없이 피란민들을 참 많이 도와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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