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내 곳곳 공비 출몰… 하루하루 ‘극도의 혼란’ 반복

1950년 말 충청권은 곳곳에 공비가 출몰할 정도로 치안이 불안하고 유언비어가 횡행했다. 사진은 미군이 1950년 10월 충북 영동에서 생포한 빨치산.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제공
1950년 말 충청권은 곳곳에 공비가 출몰할 정도로 치안이 불안하고 유언비어가 횡행했다. 사진은 미군이 1950년 10월 충북 영동에서 생포한 빨치산.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제공
‘미몽(迷夢) 중에 헤매는 잔비(殘匪) 도당, 대거 래습(來襲) 음모 범인 체포’

대전일보 1950년 11월 25일자에 실린 기사다. 국군 제3군단 소속 CIC(방첩부대) 조치원 파견대가 19세의 인민군 여성 특무상사 장향진과 부여출신으로 김일성대학을 나온 소위 한익상을 검거했다는 것이다. 북로당 출신의 이들은 아군의 북진으로 퇴로가 막히자 60여명의 북한 병사와 함께 충남 망월산에 숨어들었다. 장향진은 대담하게도 조치원을 습격하기 위한 정탐에 나섰다. 시내 식당에 취업한 뒤 CIC 파견대에 식사를 나르며 부대의 상황과 경비실태, 조치원 시내 지리를 염탐하다 붙들린 것이다.

아군이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하고 서울을 수복한 뒤 북진을 계속할 무렵 대전은 어땠을까?

1950년 10-11월은 전쟁으로 인한 공포와 유언비어가 횡행한 혼돈의 시기였다.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하고 박천과 영변을 거쳐 두만강 가까이 이르렀지만 후방은 여전히 안개 속 같은 혼란이 계속됐다. 제5열이 곳곳에서 민심을 교란하는 모략전을 벌였고, 험준한 산에 은거한 공비들은 대전시내 기습을 노렸다. 대둔산 운장산 서대산과 인접한 충남 논산과 금산의 일부 마을은 밤이면 빨치산이 내집처럼 드나들었다.

충남도청과 대전시가 업무를 재개하고, 경찰과 군이 함께 치안확보에 나섰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상당수 공무원이 희생됐고 일부는 행방을 감추거나 업무에 복귀하지 않았다. 전기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고 도로도 막혔으며 통신도 두절됐다.

50년 11월 3일 대전일보에 실린 대전지방검찰청의 공고는 이런 상황을 잘 보여준다. 10월 13일부터 사무를 개시했지만 지검과 지청의 직원 일부가 등록을 하지 았았다며 업부 복귀를 권유하고 있다. 검찰의 업무 공백이 이럴진대 다른 곳은 말할 것도 없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 유언비어가 확대 재생산되는 것이었다.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선이 밀리는 판에 후방의 혼란은 전쟁을 패배로 몰아넣는 악재였다. 동대전경찰서장까지 나서 “유언비어는 제5열의 책동이다. 시민들은 자중(自重) 침착하라.”고 담화를 발표할 정도였다.

대전일보는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태어났다. 전선에 암운이 드리우고 후방에서 극도의 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대전시내 일우(一寓)에 뜻을 함께하는 몇명이 모였다. 동방신문에서 일했던 곽철과 충남도청 공보과장 임지호를 비롯 신문계에서 잔뼈가 굵은 김석근 홍재현 오효근 안증양 안화용 송용기 등이었다. 언론 부재(不在)의 심각성을 절감한 이들은 신속하게 신문 창간에 들어갔다. 이영진 충남지사도 적극 돕고 나섰다. 폭격으로 불타버린 폐허 속에서 인쇄기를 수습한 뒤 구두로 당국에 보고하고 16절치 크기의 삐라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중부권 대표신문 대전일보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대전일보 창간은 정확하고 신뢰성 있는 정보의 등장을 의미했다. 1면에는 최전선의 전투 상황과 정부, 미국, 유엔의 움직임이 실리고 2면에는 지역의 다양한 정보가 게재됐다. 11월 22일자에는 9사단의 대둔산 서대산 공비 소탕, 26일자에는 대전을 습격하려던 좌익 일당 검거 기사가 실렸다. 그외에도 구호미 배급, 예금 지불 재개, 철도 여객 수송 재개, 제대장병 및 제2국민병 등록 등의 공고와 안내성 기사가 연일 지면을 채웠다. 빨치산 귀순 권고문, 최덕신 삼남방면계엄사령관의 유언비어 엄단 포고문 등은 당신의 급박한 상황을 잘 보여준다.

2면 짜리 대전일보는 대전시민과 10만명이 넘는 피란민에게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다. 가장 궁금한 전방의 전황과 후방의 공비 소탕 작전, 당장의 목슴을 이어갈 쌀과 연탄 수급 상황 등을 정확하게 전달했다. 워낙 인기가 높아 고정 독자 하나 없이 대전 시내 거리에서 가판만 했는데도 매일 수만부 팔려나갔다.

대전일보 창간 맴버 송용기씨(92)는 “전쟁소식에 목말랐던 터라 매일 찍는 신문이 호외나 마찬가지였다. 배달소년들이 수백부씩 팔고 돌아와 신문을 더 찍어달라고 할 때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김재근 본사 60년사편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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