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전략적 요충지… 무수한 폭격에 철저하게 파괴

6·25 전쟁은 대전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1950년 9월30일 수복 직후 대전시내.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제공
6·25 전쟁은 대전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1950년 9월30일 수복 직후 대전시내. 사진=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 제공
1950년 전쟁의 폐허 속에 탄생한 대전일보에는 세월의 온갖 풍상이 담겨있다. 창간 60주년을 맞아 대전일보의 탄생과 성장, 지면에 나이테처럼 남아있는 충청권의 여러 사건과 사고, 지역사회 개발과 발전, 세태 변모 과정 등을 살펴보는 시리즈를 마련했다.<편집자 주>

1950년 6월 27일 저녁 KBS대전방송국 유모 과장은 영문도 모른 채 고급승용차에 실려 충남도청으로 갔다.

그가 당도한 도지사 관사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있었다. 인민군이 밀고 내려오자 이 대통령은 이날 새벽 2시 특별열차를 타고 몰래 서울을 빠져나온 터였다.

이 대통령은 유 과장에게 “저녁에 특별방송을 하겠다. 인력과 장비를 준비하라!”라고 지시했다.

이날 저녁 9시 이승만은 “동포 여러분…우리 군이 의정부를 탈환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안십하십시요.”라고 거짓방송을 했다.

대전과 6.25에 얽힌 비화 중의 하나다.

대전에게 6.25는 무엇인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한국전쟁은 대전을 폐허로 몰고갔다. 1950년대 당시 대전일보에는 ‘회진(灰塵)’이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말 그대로 전쟁으로 재와 먼지만 남기고 여지없이 멸망, 소멸됐다는 것이다.

6.25 전쟁 때 대전은 대략 4차례의 큰 사변(事變)과 변화를 겪었다.

첫째는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에 잠시 머무르다 떠나고, 아군이 우익을 학살한 7월 중순까지의 시기다. 이승만은 27일 대전에 도착한 뒤 충남도청에 자리잡았다. 이 대통령은 자신이 마치 서울에 있는 것처럼 속이며 거짓방송을 한 뒤 각료들과 한동안 대전에 머물렀다. 그러나 전황이 계속 불리해지자 7월 1일 열차편으로 이리(익산)로 줄행랑쳤다.


▲아군 헌병대는 1950년 7월초 대전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여순사건, 제주 4·3사건 관련자 등 좌익 1800여명을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했다.

7월 6일부터 좌익 집단 학살의 비극이 시작된다. 군 헌병대는 대전형무소에 있던 여순사건과 제주 4.3사건 관련자, 남로당원 등을 솎아내 산내 골령골로 실어날랐다. 미군과 대전 지역 유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3일 동안 1800여명을 학살했다. 7월 중순까지 보도연맹원과 좌익들에 대한 처형이 계속됐다.

두번째는 미군과 인민군의 대전전투다.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미 24사단을 긴급투입했지만 오산 평택 천안에서 계속 패배하고, 조치원과 금강도 내주기에 이른다. 24사단장 딘소장은 전력을 재편성하여 경부선 길목인 대전에 저지선을 폈다. 그러나 7월 19일 인민군 최정예 1군단 예하 3사단과 4사단, 105 전차사단은 유성과 논산 방면을 점령한 뒤 탱크를 앞세워 대전시내를 유린했다. 딘 소장이 직접 3.5인치 로켓포를 쏘며 분전했지만 적의 압도적 화력에 밀려 대패하고 20일 대전에서 물러났다. 24사단은 대전전투에 참가한 3933명 중 실종 874, 사망 48, 부상 228명의 손실을 입었고, 딘 소장도 퇴로를 잃고 헤메다 포로가 됐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인민군은 대전교도소에 수용 중이던 공무원 경찰 교사 군인포로등 3100여명을 학살하고 도주했다

세번째는 7월 20일부터 9월 29일까지 인민군이 대전을 지배한 67일간이다. 이 시기 북한은 대전에 인민 정부를 세우고, 젊은이들을 징집하여 전선으로 보냈다. 미처 피란하지 못한 군인과 경찰, 공무원 우익인사에 대한 처형이 이뤄졌다. 공산체제를 선전하는 공연과 집회가 잇따랏다. 한국전쟁에 본격 참가한 미군은 병력과 물자의 보급을 차단하기 위해 경부선 축(軸)에 위치한 대전을 대대적으로 폭격했다. 인민군은 철수하면서 대전형무소에 있던 우익인사와 경찰, 공무원, 한국군과 미군 포로 등 3119명을 학살했다.

네번째는 인천 상륙작전에 힘입어 아군이 대전을 수복한 9월 29일(혹은 10월 3일) 이후 종전까지 기간이다. 아군과 유엔군이 탈환한 대전은 폐허 그 자체였다. 대전역 주변은 폭격의 잔해만 널려있고, 충남도청에 이르는 중앙로는 성한 건물이 거의 없었다. 대전 시민과 피란민들은 폐허 더미에서 벽돌과 나무조각으로 얼기설기 엮어 비바람을 피하며 생존과 복구에 매달렸다.

경부선 축에 위치한 대전은 어느 도시보다 철저하게 파괴되고 유린됐다. 전략적 요충지라는 점 때문에 강력한 폭격이 이뤄진 탓이다. 무엇보다 좌우익의 극한 대립으로 수천명이 처형된 인적 희생의 충격이 가장 컸다. 삼남의 길목이라는 점 때문에 군사력이 몰렸고, 좌우익 인사도 집중적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집단처형됐다. 전국 어느 도시보다 고통스런 희생을 치른 것이다.

대전에게 6.25는 교통의 요지라는 ‘축복’이 ‘참화’와 ‘저주’로 돌변한 광기(狂氣)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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