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일보 로고

창간 60주년 중국 동북3성 한국역사를 찾아서-국내성과 광개토대왕릉비·장수왕릉

2010-09-04기사 편집 2010-09-03 06:00:00     

대전일보 > 문화 > 문화재

  • 페이스북
  • 구글 플러스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블로그
  • 네이버밴드
  • 핀터레스트
  • 기사URL 복사

광활한 만주벌판 호령하던 고구려 흔적 온데간데 없고…

첨부사진1고구려시대 가장 광활한 영토를 확장했던 장수왕릉 전경. 능 상층부에선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인 국내성을 조망할 수 있다.

아침일찍 단동을 출발해 광할한 옥수수밭을 거쳐 버스로 5시간 여동안 달려온 끝에 길림성 집안시에 도착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다. 방문단은 우선 북한식당을 찾아갔다. 그런데 식당 주차장 한 켠으로 허름한 돌담길이 눈에 들어왔다.

주차장 옆 저층 아파트단지를 지탱해주는 석축역할의 돌담길인듯 싶었다. 하지만 아파트 신축시 석축으로 쌓았다고 보기엔 너무 오래돼 보였고 군데군데 끊어진 부분이 있었지만 아파트단지가 끝난 부분까지 돌담이 이어졌다. 국내성 성벽이다.

북한 만포시와 압록강을 마주한 집안. 지금은 인구 25만명의 크지않은 도시지만 기원전 3세기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로서 경제, 문화, 정치의 중심지였다. 집안시 전체를 둘러싼 국내성의 전체 길이는 2686m에 달했다는 데 이제 도시 곳곳에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다. 북한식당앞 성벽은 중국정부가 집안시 고구려유적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복원하고 정비한 덕에 그나마 상태가 양호하다는 것이다. 실제 광개토대왕비로 이동하던 중 도심 곳곳에 남아있는 성벽을 볼 수 있었다. 때로는 하천변 오래된 제방처럼 야트막한 돌담이 눈에 들어오고 주택가에 매몰된 일부 성벽은 누군가의 빨래가 널려진 ‘담장’일 뿐이다.

집안 도심에서 북동쪽으로 30여 분간 버스로 이동하니 광개토대왕릉·비, 장수왕릉을 만날 수 있었다. 현재 집안시 곳곳에는 고구려 릉과 묘만 1만2000여 기가 넘는다. 이중 외형이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는 것은 장수왕릉이 유일하다. 동양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이 릉은 높이가 13m에 달하며 7층의 계단식 적석총이다. 쌓아올린 장대석은 총 1100여 개로 얼핏 보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지만 균형이 잘 잡혀있고 각 면에 큰 돌 4개를 기대 오랜 풍파를 견뎌낼 수 있었다. 능에 사용된 돌들은 64㎞ 떨어진 채석장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광할한 대륙을 지배했던 고구려인의 위상과 기술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은 문화재 보호를 위해 올라갈 수 없지만 최근까지 계단을 따라 장수왕릉 상층부의 석실까지 입장이 허용됐었다. 석실에선 고구려수도였던 국내성이 한 눈에 보인다한다. 고구려왕릉은 왕이 살아생전에 자신의 무덤을 조성했다니 장수왕은 죽어서도 고구려를 굽이 살펴보려 했음일 게다.

서기 414년 고구려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대왕비는 높이 6.5m에 무게는 수 십톤에 달한다. 삼국시대뿐 아니라 이 비가 세워질 당시 세계 어느 곳에서도 이처럼 거대한 비는 찾기 힘들다. 그 웅장함에 위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온전히 간직해온 광개토대왕비가 20세기 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우리에게 옛날 대륙의 산악을 달렸을 기마민족의 기상을 이어받아 미래 역사의 주인으로 떨쳐 일어나라는 주문이 아닐까.

비석에 새겨진 내용은 고구려의 탄생과 광개토대왕의 영토 정복에 관한 것으로, 주변국가와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다. 중국 정부는 안전한 문화재 관리를 이유로 비 주변에 두꺼운 유리관을 설치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공개된 지 20여 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탁본을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또 실내 전시공간에 있는 게 아니어서 촬영으로 비석이 상할 리가 없는데 유리관내 사진촬영을 금지하고 있다. 비석의 금간 곳을 비롯해 일부 회를 발라 비문을 다시 써넣은 것에 대한 해석이 한국, 일본, 중국 등 세 나라 모두 제각각이어서 공동연구가 필요하다는 게 역사학계의 공통된 주장이지만 중국 정부는 이를 강하게 거부하고 있다한다. 촬영도 못하게 하고 공동조사도 안 되는 이유는 한마디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광개토대왕릉은 명성에 비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장수왕릉의 5배나 된다는 기록과는 달리 릉은 거의 허물어지고 윤곾만 남았다. 높이 14.8m, 한 변이 66m에 이르는 네모꼴 계단식 석실묘였다지만 아무리 봐도 네모모양이 실감나지 않는다.

무덤 꼭대기에 관을 넣어 두었던 널방이 있는 데 이 곳역시 사진촬영이 엄격히 제한된다. 널방 내부는 물론 널방 입구를 촬영하는 것도 제제를 당한다. 널방은 반들반들하게 잘 다듬은 돌을 쌓아 석실을 만든 것이었는데 널방내 남측 벽면을 올려다 보면 천정 부근에 검은색 구멍이 있다. 도굴 흔적인 것이다. 광개토대왕릉과 장수왕릉은 그들의 화려한 업적에 비추어보면 많은 수장품들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나 모두 도굴 또는 훼손돼 외형만 남았을 뿐이다.

광개토대왕비와 릉 사이의 넓은 초원에는 400여 가구가 모여 살았다는데 최근 중국정부가 고구려 문화유산에 대한 유네스코 등재 과정에서 이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한족이든 조선족이든 고구려의 정기를 지켜온 후손들일진데 말이다. 오호분묘 역시 일반인들에게 개방되면서 제대로 관리되지않아 벽화 일부분이 훼손됐다.

우리 역사상 가장 화려했고 강성했던 고구려. 하지만 집안에서 만난 유적들은 무엇하나 온전한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송충원 기자 one@daejonilbo.com =한국스카우트충남연맹홍성지구회 후원.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