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주자학에 몰두… 임금 학문수양 강조

송자대전 목판
송자대전 목판
조선의 성리학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 붕당이라는 폐단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학문의 완숙도는 점점 깊어져 갔다. 이 시기에 조선 유학을 한 단계 발전시킨 대학자가 우리 고장에서 나왔으니 그가 곧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 선생이었다.

송시열은 선조 40년(1607) 11월 충북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에서 은진 송씨 송갑조(宋甲祚)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해 세 살에 스스로 문자를 알았고 7세에 형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이를 받아썼다 한다. 아버지는 항상 주자는 공자의 후계자요 율곡은 주자의 계승자임을 강조하면서 송시열에게 주자를 열심히 배우라 권했다. 그리하여 8세가 된 송시열은 이종인 송이창(宋爾昌)의 문하에서 그의 아들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학문을 닦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후일 평생 뜻을 같이한 계기가 이때 마련된 것이다.

송시열은 19세에 이덕사(李德泗)의 딸과 결혼했고 22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삼년상을 마친 뒤 충남 연산에 은거하던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다. 그러나 수학한 지 일 년 만에 스승이 죽자 그 아들 신독재 김집(愼獨齋 金集)에게서 사사했다. 그와 같이 동문수학한 이들은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초려 이유태(草廬 李惟泰), 미촌 윤선거(美村 尹宣擧), 시남 유계(市南 兪棨) 등이었다. 이들이 이른바 충남 5현(五賢)이라 일컬어지는 인물들이었다.

인조 11년(1633), 27세의 송시열은 대제학 최명길(崔鳴吉)이 주관한 생원시에 장원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올랐다. 그리고 2년 뒤 왕자 봉림대군의 스승이 되었다. 후일 효종과의 두터운 의리는 이때 시작된 것이었다. 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대군과 비빈들은 강화로 피난하고 송시열은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성이 함락되고 대군들이 볼모로 잡혀가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속리산으로 내려와 피난해 있던 어머니를 모셨다. 난이 끝난 뒤에는 영동 황간으로 들어가 독서와 학문에 정진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이 그에게 용담현령을 제수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649년, 인조가 죽고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자 그는 왕의 부름을 받고 다시 조정으로 갔다. 그리고 당시 총애를 받던 무관 이완(李浣)과 함께 효종의 북벌계획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당시 세도를 부리던 김자점이 귀양을 가자 그의 아들 김식이 부제학 신면과 공모해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밀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청은 군사를 동원해 국경을 압박하고 특사를 보내 협박과 공갈을 했다. 이로써 북벌은 잠시 중단되고 송시열도 책임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한편 낙향해 있던 송시열은 효종의 부름을 사양하다가 효종 9년(1658)에 상경해 그해 9월에 이조판서(吏曹判書) 자리에 올랐다. 이때부터 북벌계획은 재개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로 평생 배운 바를 다해 국사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듬해 효종이 죽으면서 북벌은 중단되고 효종의 계모 조대비의 복제 문제로 윤휴․허목 등과 대립했다.

그 뒤 그는 회덕(懷德)으로 내려가 학문에 몰두했다. 그는 현종의 부름에도 사양하고 다만 글을 올려 정사의 옳고 그름을 논했다. 혹 국가의 중대사가 있을 때만 올라가 입조했다가 내려왔다. 현종 3년(1662)에는 금강산 유람길을 떠났다가 강릉 오죽헌에 들러 이율곡의 유적을 돌아보았고 4년 뒤 속리산 서쪽의 화양동에 정사(精舍)를 짓고 저술과 주자 연구에 힘썼다. 화양동에는 훗날 그의 유명으로 명(明)의 신종․의종을 제사하기 위한 만동묘(萬東廟)가 건립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현종 15년(1674),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죽으면서 벌어진 복제 문제로 다시 윤휴 등과 논쟁하여 패배함으로써 송시열은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약 6년간의 귀양살이 중에도 그는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때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 등과 같은 저서가 나왔다.

숙종 6년(1680), 허견의 모반사건으로 송시열은 영중추부사의 관직에 복구되었으나 이미 그의 나이 74세였다. 그는 1년 만에 벼슬을 버리고 회덕으로 내려가 조용히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숙종 9년경, 제자 윤증과의 사이가 극도로 악화되면서 그는 노론과 소론의 분열에 휩싸이게 되었다. 또 숙종 14년(1688)에는 장희빈의 소생을 원자로 삼은 데 반대하다가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 이듬해 6월 해남을 거쳐 정읍에 다다라 사약을 받고 생을 마쳤다. 이때 그의 나이 83세였다.

그는 주자(朱子의 학설을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그는 정치의 원리를 ‘대학(大學)’에서 구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이었다. 자신을 먼저 수양한 다음에 남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임금의 학문 수양과 도덕성 확립을 강조하였다. 실제 정책면에서는 민생의 안정과 국력 회복에 역점을 두었다. 따라서 그는 특산물을 미곡으로 대신 납부하게 한 대동법의 확대, 시행과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부담케 하는 호포제(戶布制)를 실시하여 양민들의 군역 부담을 줄여줄 것을 주장했다. 그 자신이 빈민 구제를 위해 사창(社倉)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는 많은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는데 그의 자취는 지금 대전 가양동의 우암 사적 공원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곳은 예전의 회덕으로 그를 기리기 위해 공원을 조성한 것이다. 여기에는 대전시 유형문화재 1호로 지정된 남간정사 (南澗精舍)와 기국정(杞菊亭), 송자대전판(宋子大全板)이 보관된 장경각(藏經閣)이 있다. 남간정사는 송시열이 전국의 유림(儒林)과 제자들을 모아 학문을 익히던 곳으로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는 유림들이 목판을 새겨 송자대전(宋子大典)을 펴내던 장소이기도 하다. 남간(南澗)이란 양지 바른 곳에 졸졸 흐르는 개울을 가르키는 말로, 주자의 시 `운곡남간(雲谷南澗)`에서 따온 이름으로 주자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남간정사 옆에는 소제동에서 옮긴 기국정(杞菊亭)이 있다. 그 앞에는 조그만 연못이 있는데 남간정사 대청마루 밑으로 개울물을 흐르게 해 연못으로 합쳐지게 되어 있다. 그 뒤편의 높은 곳에는 남간사(南澗祠)란 사당도 있다.

장경각에는 송자대전목판(宋子大全木板)이 보관되어 있다. 이 목판은 송시열 선생의 문집과 연보 등을 모아 만든 것으로 총 1만1023개다. ‘우암문집’의 초판은 숙종 43년(1717)에 민진후가 임금의 명을 받아 교서관에서 금속활자로 간행했다. 그 후 정조 즉위 초에 전서 간행의 어명이 떨어져 글을 수집했고, 옛 책과 합쳐 그 목판본이 정조 11년(1787)에 평안감영에서 책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 첫권과 연보는 서울의 교정소에서 별도로 간행되었으며, 총 215권 102책의 전서(全書)를 완성하여 ‘송자대전’이라 이름하였다. 이후 전쟁으로 인하여 소실되어 1929년 선생의 후손과 유림들이 다시 간행했다. 이 때 ‘송서습유’ 4책과 ‘속습유’ 2책을 함께 간행함으로써 ‘송자대전’은 총 108책이 됐다. 그의 업적과 방대한 저술은 지금도 우리의 게으름을 일깨우고 있는 듯 하다.

<대전대 인문예술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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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가양동 소재 우암 사적공원 입구
대전 가양동 소재 우암 사적공원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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