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밀한 묘사·입체감 돋보여

부여 가탑리절터 출토 금동여래입상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부여 가탑리절터 출토 금동여래입상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백제의 금동불은 현재 25㎝ 이하의 작은 불상들이 전해진다. 소형금동불이나 판불(板佛)은 휴대가 용이해서 승려들이 가지고 다니며 불법을 전하는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지만 백제에서 소형금동불 뿐 아니라 대형금동불도 함께 제작되어 법당에 안치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금동대불의 광배(光背)로 추정되는 부여 능사리 출토 금동광배편은 그 좋은 예이다.

백제불상이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6세기 초 중앙에 주불이 있고 좌우에 협시보살을 둔 ‘일광삼존불(一光三尊佛)’양식이 유행했으며 부여 부소산에서 출토된 ‘정지원’명 삼존불(보물 196호)이 대표작이다. 이 시기의 불상들은 얼굴모습과 체형, 법의의 표현 등에서 대체로 북위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보주(寶珠)를 양손에 들고 있는 ‘봉보주보살상’에서 남조의 영향도 찾을 수 있다.

백제의 도읍이 사비로 옮겨지고 각종 불사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새로운 분위기를 반영하는 백제불상들이 제작되기 시작한다. 이 시기의 불상들은 표정이 훨씬 밝아지고, 백제 특유의 여유로우면서도 다소 천진한 미소가 표현되기 시작하는데, 부여 군수사리지 출토 금동보살입상(보물 330호)이 대표적이다. 또한 부여 신리에서 일괄 출토된 여래좌상, 2구의 보살입상, 신장상 등은 각각의 상들이 삼존불의 틀에서 벗어나 독립된 상으로 조성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7세기에는 남북조시대가 끝나고 수당문화가 새롭게 전개됐다. 이 시기의 불상들은 신체비례와 입체감이 강조되어 허리에서부터 몸의 중심이 살짝 틀어진 ‘삼굴(三屈)’자세의 불상이 유행했으며, 전체적으로 훨씬 세련된 조각수법을 보여준다. 또한 보관(寶冠)에 화불(化佛)을 분명하게 표현함으로써 보살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표현방식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불상으로는 부여 규암면 출토 관세음보살 입상(국보 293호)과 공주 의암면 송정리 출토 관세음보살입상(국보 247호)등이 있다.

1913년 부여 가탑리절터에서 출토된 7세기 금동여래 입상<사진>은 머리와 양쪽 손이 파손되었지만, 수인은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여원인(與願印)을 취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진 옷주름이 세밀하게 표현되어 완숙한 세련미를 느끼게 해준다. 법의는 하단부에 이르면서 날개처럼 전개되었는데 이러한 양식은 백제의 금동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뒷면은 어깨 부분에 약간의 옷주름과 묶는 끈이 있고 아래에 이르러 법의자락이 표현되어 있다. 이 불상은 비록 완형은 아니지만 일본 호류지(法隆寺) 소장 불상 중 유사한 것이 있어 한일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불교를 통해 중흥을 이룩하려던 성왕의 노력은 도읍을 사비로 천도한 538년 이후에도 계속된다. 성왕 19년(541), 중국 양나라로부터 모시박사와 함께 열반 등 불경의 해석서 및 공장, 화사 등을 들여온 것은 백제 불교문화가 한층 발전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생각된다. 성왕은 또 일본에 불교를 전하는 일에도 힘썼다. 성왕 30년(552), 노리사치계가 금동석가불상, 깃발, 경론과 함께 일본에 들어가 일본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해주었으며, 2년 뒤 담혜등 승려 9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불교가 일본사회에 뿌리내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김수영 기자 swimk@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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