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 선봉 이치대첩… 왜군 호남 진공 차단

충남 금산군 금성면에 소재한 칠백의총
충남 금산군 금성면에 소재한 칠백의총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은 내부적인 혼란에 휩싸이게 됐다. 연산군대부터 시작된 4대 사화(士禍)로 정국은 어수선했다. 또 선조 초년부터 시작된 동·서 분당의 당쟁으로 지배체제가 크게 흔들렸다.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은 급변해 가는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오직 명나라와의 사대관계에 의지한 채 정쟁과 권력싸움으로 일관하던 중 일본의 침입을 맞았다.

당시 일본은 16세기 전반기에는 전국의 다이묘(大名)들이 서로 할거하는 전국(戰國)시대가 연출되었으나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뒤를 이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등장해 통일 사업을 마무리지어가고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 여세를 몰아 명나라까지도 차지하려 했다. 전국시대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난 후 봉건영주들의 관심을 해외로 돌리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리하여 명 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길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은 속수무책이었다. 신립장군에 의한 충주 탄금대 전투가 패배하면서 순식간에 도성이 함락되고 선조는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왜군은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봉기와 이순신 휘하에 있는 조선수군의 활약으로 인하여 왜적의 진격로, 수송로가 차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은 자발적으로 부대를 조직하여 향토의 방어에 앞장섰다. 전직 관료와 사림, 그리고 고승들이 분연히 일어나 농민들이 주축을 이룬 의병을 지휘하였다. 의병의 장점은 그 지역의 지리에 익숙하여 지역에 실정에 맞는 전술을 수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 명성을 떨쳤던 의병장은 평안도의 서산대사 휴정, 함경도의 정문부, 경기도의 김천일, 경상도 의령의 곽재우, 충청도의 조헌, 전라도의 고경명, 강원도의 유정 스님 등이었다.

이들 의병은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고 관군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활약을 하기도 했다. 충남 지역에서도 관군과 연합한 의병의 활약이 있었다. 이치대첩(梨峙大捷)과 조헌을 비롯한 칠백 의사의 활약이 그것이다. 특히 육상으로 올라왔던 왜적이 전라도 지방에 들어오지 못한 것은 이치대첩 때문이었다. ‘이치’는 현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서 전북 완주군 운주면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이 고개는 대둔산을 넘어가는 고개로 전라도로 진출할 수 있는 길목이었다. 일찍이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은 금산에 주둔해 있는 왜군을 공격하다 전사한 바 있었다. 반면 금산군수 권종(權悰)을 죽이고 금산을 점령하였던 왜군은 고경명의 의병을 물리친 후 곧 바로 전주로 직행하려 했다.

고경명의 뒤를 이어 군사를 이끌고 온 사람은 권율(權慄) 장군이었다. 그가 거느린 부대는 1,500여 명 가량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의병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이치에 주둔하면서 목책이나 여장(女墻·성 위에 낮게 쌓은 담)과 같은 방어 시설을 구축하고 적을 맞이하였다. 그는 전투에 앞서 부하들에게 말했다. “오늘의 전투는 진격만 있을 뿐 후퇴는 있을 수 없다. 또 죽음만 있고 삶은 없다.”라고 비장한 각오를 말했다. 권율과 함께 이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한 인물은 황진(黃進)이었다. 그는 당시 전라도 동복 현감이었는데 이 전투의 선봉장이 됐다.

이때 권율은 황진에게 말했다. “양호(兩湖 : 전라 좌도와 우도를 말함)의 존망과 국가의 안위가 이 일전에 달렸다. 만약 이번에 소탕하지 않으면 왜적들이 다시 호남을 넘볼 것이다. 선봉의 역할은 그대가 아니면 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자 황진은 기꺼이 수락하면서 말했다. “모름지기 신하된 자가 몸을 바치고 명령을 따라야 할 이 때에 뜨거운 물이나 불이라도 사양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선봉은 진실로 제가 원하던 바입니다. 원컨대 장군깨서는 믿어의심치 마십시오.”

전투가 개시되자 황진은 자신의 말처럼 전력을 다해 적과 싸웠다. 그는 이미 그 휘하의 공시억, 위대기 등과 이 전투에서 순국할 것을 결의한 바 있었다. 그는 다리에 총을 맞으면서도 쉴 새 없이 활을 쏘아 적을 거꾸러뜨렸다. 그러나 조총으로 무장한 적은 계속 진격을 가해왔다. 결국 황진은 조총을 머리에 맞고 쓰러졌다.

황진이 쓰러지자 이를 틈탄 왜군은 성채 안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그러자 권율은 스스로 선봉장이 되어 전쟁을 독려했다. 아군도 오히려 성채를 넘어 성난 파도처럼 밀고 나갔다. 왜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남긴 채 금산쪽으로 도주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진산 쪽 골짜기에 매복하고 있던 권승경 부대가 적을 기습하였다. 혼비백산한 왜적은 금산성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당시의 전투 상황을 ‘만취당실기(晩翠堂實紀)’, ‘임진사적(壬辰事蹟)’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양군은 육박전으로 진시(辰時·오전 8시)부터 신시(申時·오후 4시)까지 격전을 치렀다. 오래도록 승부가 결판나지 않았으며 황진이 총에 맞아 물러나자 공(권율)이 스스로 선봉이 되어 분연히 몸을 떨치고 호령하니 아군이 모두 사력을 다하였다. 신시부터 유시(酉時·오후 6시)까지 적이 조금 물러났다. 아군이 용기를 내어 진격하니 한 명이 백 명을 당해내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 전황은 비탈을 달려 내려가는 형세였으며 옥상에서 물동이로 물을 쏟아붓는 형국이었다. 적의 무너짐이 바람에 날리는 비와 같았으며 패하여 달아남이 양이나 돼지와 같았다. 긴 골짜기를 따라 30리에 이르기까지 적을 쫓아 섬멸했다. 이에 적병 수만이 거의 다 패하여 죽었다. 이치대첩의 승리로 왜적은 전라도로 진출하지 못해 군량을 본국에서 수송해 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한편 금산으로 도망해 주둔하고 있던 왜군은 의병장 조헌(趙憲) 부대와 다시 한번 일전을 벌여야 했다. 이미 청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바 있던 조헌은 전라감사 겸 순찰사였던 권율에게 금산성 협공을 제의한 후 승병장 영규와 함께 공주에서 유성을 거쳐 금산에 이르렀다. 그러나 기다리던 관군은 오지 않았다.

그것은 충청감사 윤선각의 행동과 관련이 있지 않나 한다. 조헌은 전에 윤선각이 경내의 방어에만 힘쓰고 왕을 위한 행동이 없음을 비판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윤선각은 조헌이 거느린 의병을 공주로 오게 하여 의병을 관군에 편입하고 자신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 이를 거부한 조헌은 독자적인 행동에 나서 금산성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윤선각이 권율에게 조헌을 독선적인 인물이라 비난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후속부대가 없는 것을 눈치챈 왜군은 조헌을 비롯한 7백 의사들을 야간에 기습하였다. 조헌 부대는 전력을 다해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다. 그들은 결국 현 충남 금산군 금성면에 있는 ‘7백의총’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충의(忠義) 정신은 지금도 생생히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대전대학교 인문예술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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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완주군 운주면에 소재한 이치대첩 전적비
전북 완주군 운주면에 소재한 이치대첩 전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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