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복위 도모… 회유 거절하고 끝내 옥사

조선 역시 왕조 초기에는 왕위 계승이 순탄치 않았다. 태종(太宗)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도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당하였다. 태종의 후계자도 장자가 되지 못하고 셋째 왕자인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곧 세종(世宗)이었다. 세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문종(文宗)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병약했던 문종은 2년 3개월 만에 죽고 12살의 세자가 그 뒤를 이었으니 그가 곧 비운의 단종(端宗)이었다. 생전에 문종은 대신 황보인․김종서 등과 집현전 학사들에게 어린 세자를 잘 보필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집현전 학사들과 김종서․황보인 등의 대신들은 정치적 입장이 서로 달랐다. 집현전 학사들은 경연관으로서 왕과 직접 대면하여 학문을 토론할 수는 있었지만 정치에 크게 관여할 수 없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학사들은 집현전을 떠나 출세가 보장되는 대간(臺諫)․정조(政曹)로 옮기려 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세종의 강경한 태도로 쉽지 않았지만, 문종이 즉위하면서 집현전 학사들이 대간과 같은 요직에 대거 발탁되었다.

하지만 문종이 일찍 죽고 단종이 즉위하자 세력을 잡은 김종서․황보인 등은 집현전 학사출신들의 출세에 장애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왕실의 권한회복을 꿈꾸던 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서․황보인의 제거에 협조하였다. 그것은 정난공신(靖難功臣)이나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집현전 학사출신들의 비중이 컸던 것에서 알 수 있다. 정난공신은 단종 원년 10월 수양대군이 김종서․황보인 등 당시의 의정부 대신들을 제거한 직후 책봉한 것인데, 문과급제자 12명 가운데 8명이 집현전 학사출신이었다. 성삼문을 비롯하여 권람․박중손․신숙주․이계전․이사철․정인지․최항 등이 포함되었다. 좌익공신은 세조가 왕위에 오른 직후 원년 9월에 즉위를 도와준 인물들을 책봉한 것인데 여기에도 집현전 학사출신이 7명이나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집현전 학사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집권을 합리화하려는 세조의 의도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집현전 학사출신을 비롯한 유신들을 공신으로 책봉하여 왕권을 효과적으로 강화하고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집현전 학사들이 진정으로 세조의 즉위에 협조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남아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집현전 학사들은 자신들이 이용만 당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왕권 강화를 꿈꾸는 세조 밑에서 그들의 입지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들고 나온 것이 명분과 선왕의 부탁이었다. 한번 신하가 됐으면 그 왕을 끝까지 모셔야 하는 것이 유교의 의리이며 명분이었다. 소위 ‘불사이군(不事二君)’이었다. 또 신하된 입장에서 선왕인 문종의 유지를 끝까지 받들어야 한다는 것을 내세웠다.

그리하여 성삼문을 비롯한 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 등의 집현전 학사들과 무인이었던 성승․유응부․김질, 그리고 단종의 외숙 권자신(權自愼) 등은 상왕〔단종〕을 복위시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세조 2년(1456) 6월 세조가 세자와 같이 명나라에서 온 사절을 창덕궁에서 맞기로 하였는데, 성삼문 등은 성승․유응부로 하여금 별운검(別雲劍ː왕이 행차할 때 옆에서 칼을 들고 호위하는 무관)이 되게 하여 세조와 세자를 없애기로 하였다. 또 앞장서서 세조의 즉위를 도운 신숙주도 살해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거사가 있을 것을 눈치챈 한명회는 “광연전〔창덕궁 내에 있는 집〕이 좁고 더우니 세자와 운검을 들이는 것은 그만두는 것이 좋겠습니다”라 하여 세조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것을 모르고 칼을 들고 입장하려던 성승은 한명회의 저지를 받자 먼저 그를 살해하려 하였으나 삼문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유응부 또한 이 소식을 듣고 거사는 미루면 안된다고 말하면서 단신 돌입하여 거사를 수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집현전 학사들의 만류로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신숙주를 죽이려던 윤영손도 이 소식을 듣고 철수하였다. 이렇듯 거사가 연기되자 이 모의가 누설될까 두려워한 김질(金質)은 장인 정창손을 찾아가 사실을 고하였다. 정창손은 이를 세조에게 고함으로써 거사에 가담한 자는 모조리 붙잡혔다.

모진 고문 끝에 성삼문을 비롯한 거사자들은 형장으로 끌려가 기슬처럼 사라져 갔다. 그 중에는 현 대전 출신의 박팽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순천 박씨로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이었다. 형조판서 중림(中林)의 아들이었다.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 성삼문(成三問)과 함께 집현전(集賢殿) 학사로서 여러 가지 편찬사업에 종사하여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38년 공부에 전념하라고 세종은 그에게 학문연구에 전념하도록 ‘사가독서(賜暇讀書)’란 특별 휴가를 주기도 했다. 1453년(단종 1) 우승지를 거쳐 1454년 형조참판이 되었다. 이처럼 그는 세종의 유명을 받아 황보인, 김종서 등과 함께 문종을 보필하였다. 1455년(세조1) 세조가 즉위하자 그는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이듬해 형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성삼문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김질(金礩)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탄로되어 체포되었다.

그의 재능을 아끼는 세조의 회유도 끝내 거절하고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죽었으며 아버지, 동생 대년(大年), 아들 3형제도 사형당하였다. 그 뒤 과천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洪州)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등 여러 서원에 제향되고, 숙종 때 복권되었으며 영조 때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또 충성스럽고 바르게 살았다는 뜻으로 ‘충정(忠正)’이란 시호를 받았다.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있다.

그가 잡혀 취조를 당할 때 세조는 그의 재주를 아껴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그를 회유하였다. 그러나 이를 거절하자 세조는 그를 불러 놓고 호통을 쳤다. “네가 이미 자신을 나의 ‘신(臣)’이라 칭해 놓고 지금 와서 신하를 칭하지 않으니 이치에 맞는 말인가?” 이에 박팽년은 단호하게 말하였다. “나는 상왕의 신하이지 당신의 신하라 칭한 적이 없소. 충청감사로 있을 때 당신에게 올린 문서에도 결코 ‘신’이라 칭한 적이 없었소.” 세조는 사람을 시켜 문서들을 조사해 보니 과연 ‘신’자는 하나도 없었다 한다. 그의 절개를 가히 알만한 부분이다.

또 그는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은 시로 읊기도 했다. 까마귀 눈비 맞아 희난듯 검노메라/ 야광명월(夜光明月)이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여기서 까마귀는 세조에게 아부하는 세력들을 가리킨다. 까마귀가 눈비를 맞아 잠시 흰 것처럼 보이지만 금방 검은 색깔을 드러낼 수 밖에 없다. 빛나는 밝은 달은 밤이 와도 빛을 잃지 않고 더욱 빛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세조의 위협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단종에 대한 충성심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의리와 충의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시조이다.

그는 사라졌으나 그의 발자취는 지금도 생생히 남아 있다. 대전광역시 동구 가양동에는 그가 살던 집터가 남아 있고 유허비가 쓸쓸히 빈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전대학교 인문예술대학 학장>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