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졸한 자체·신중한 운필 웅진시기 백제 서예 진수

사진=국립공주박물관 제공
사진=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대통사지 출토 ‘대통(大通)’새김 기와조각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대통大通’이라는 글을 새긴 기와조각이 공주시 대통사터에서 출토됐다. 이 문화재는 기와의 표면(瓦面)을 요형凹形으로 1단 낮게 원형으로 형성하고 그 안에 지름 1.5cm 크기의 글자를 상하로 배치한 것. 이 대통새김 기와조각은 매우 고졸한 자체와 신중한 운필로 되어 있어 무령왕릉출토 묘지석과 함께 웅진시기 백제 서예의 진수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기와조각은 미세한 태토에 견고하게 소성되었고, 색조는 회흑색이다. ‘대통’새김 기와조각은 최대 폭이 6.5cm, 길이 4.1.cm, 두께 1.3cm의 조그마한 잔편으로 남아있다.

백제시대에 봉황산 밑에 한 스님이 살고 있었다. 꿈에 산신령이 현몽하여, ‘큰 절을 봉황산 밑에 세우되 정성껏 기도를 올려야 한다’고 하였다. 스님은 봉황산에 제단을 차려 놓고 매일 밤 목욕재계를 하며 백일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웅대한 대통사라는 절을 지었다. 이 ‘대통사 연기 전설’의 주요 모티브는 산신령의 현몽 계시와 대통사의 창건이다. 이 전설은 웅진 백제의 큰 사찰이었던 대통사의 사찰연기설화(寺刹緣起說話0인데, 이것으로 미루어 대통사가 웅진 백제시대 공주에 있는 가장 큰 사찰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지금의 공주시 반죽동 제민천변에 있는 대통사터(大通寺址)는 백제 성왕 5년인 527년 창건된 사찰이다. 지금 절터에는 통일신라시대에 건축된 당간지주가 남아있는데, 이것은 이 사찰이 통일신라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판단하는 근거가 된다.

대통사의 창건과 관련해서는 삼국유사 권 제 흥법 제3 원종 흥법조에는 ‘대통원년정미 위양제창사여웅천주 명대통사(大通元年丁未 爲梁帝創寺於熊川州 名大通寺)’라고 되어있다. 이는 대통 원년, 즉 성왕 5년인 527년에 대통사라는 절을 창건하였고, 이는 중국 양나라의 황제를 위해서라고 전하면서 이 절이 웅천주 즉 공주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또 다른 창건설은 성왕 3년 525년 성왕이 아버지 무령왕의 명복과 아들 위덕왕의 건강을 위해 ‘법화경(法華經)’의 대통불을 모시기 위해 사찰을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다.

공주교육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대통사지 출토 와당은 8개의 연꽃잎에 작고 낮은 형태로 중앙을 장식하였는데, 8개의 연꽃잎은 끝이 살짝 반전하는 형태로 웅진시기 백제 와당을 대표하고 있다. 공주 무령왕릉 출토 연화문전과 문양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중국 남조 양나라의 영향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대통’새김 기와는 일제강점기에 반죽동 대통사에서 수습되었는데, 또 1점이 부여 부소산성에서 출토되었다. 대통은 중국 남조 양나라 무제8년(527)에 사용된 연호이다. 양 무제는 527년에 중국 남경에 동태사同太寺를 창건하고 그의 재위기간동안(502~549년) 4차례에 걸쳐 출가와 환속을 반복하였다.

백제 성왕은 무령왕이 돌아가신 523년 여름에 즉위하여 525년에 무령왕의 장례를 치루고, 무령왕의 명복과 아들 위덕왕의 건강을 기원하기 위한 왕실사찰 성격을 가진 대통사를 창건하였던 것이다. 또한 526년 돌아가신 어머니의 장례식을 529년에 마치고 나서 부여 천도를 본격적으로 준비하였는데, 그 결정적인 증거가 부여 부소산성에서 출토된 대통명이 새겨진 기와조각인 것이다.

이 작은 ‘대통’새김기와조각 1점이 지금까지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백제 성왕 즉위 초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돌아가신 부모의 명복과 아들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수도 천도의 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왕실전용사찰 성격을 가진 대통사를 건립하였던 520-530년대 성왕의 모습이 30년이 지난 567년 정해년丁亥年에 그 아들 위덕왕이 부왕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부여 능사 건립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김효숙 기자 press1218@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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