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후예국’ 元 반란군 격파 ‘값진 승리’

연기군은 조치원읍 부근 고북저수지에 연기대첩비를 세워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고 있다.
연기군은 조치원읍 부근 고북저수지에 연기대첩비를 세워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고 있다.
고려는 최우 집권기인 고종 18년(1231) 몽고의 대규모 침입을 맞게 되었다. 최우 정권은 이듬해인 1232년 강화도로 천도하여 항거하였다. 그러나 육지에 남아 있던 백성들은 몽고군을 맞아 싸워야 했다. 충남 지역에서도 공주나 아산, 온양 지역에서 몽고군을 맞아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1270년 고려는 개경 환도를 단행하였고 여러 측면에서 몽고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충남 지역이 다시 한번 큰 전장으로 변한 것은 충렬왕 17년(1291)년부터 다음해인 충렬왕 18년(1291)의 일이었다. 원의 합단(哈丹) 무리가 침략한 것을 연기에서 크게 무찌른 것이었다. 침략의 원인은 원 나라 내부의 황위 계승전에 있었다. 즉 1259년 몽고제국의 헌종(몽케)이 사망하자 동생들인 쿠빌라이(忽必烈)와 아릭부게(阿里不哥)가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싸움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쿠빌라이가 승리하여 왕위에 올라 세조(世祖)가 되었다. 그리고 1271년 국호를 원(元)이라 하였다. 그러나 아릭부게와 그 동조자들은 이에 항거하였다. 카단(哈丹)이란 인물도 그 동조자 중의 하나였는데 그는 징기스칸 동생의 후손이었다.

이에 원 세조(世祖) 쿠빌라이는 손자 티무르(帖木兒·뒤의 成宗)에게 이들에 대한 정벌을 명령하였다. 각지에서 정벌군에 의해 패배한 합단의 무리는 두만강 쪽으로 도망하게 되었고 충렬왕 16년(1290) 초 고려의 동북 변경으로 넘어들어 왔던 것이다.

합단(哈丹)군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개시된 것은 충렬왕 16년(1290) 12월의 일이었다. 합단(哈丹) 무리 수 만이 침략하여 쌍성총관부 지역을 거쳐 화주(和州)·등주(登州) 등을 함락시켰다. 그들의 침략 행위는 아주 야만적이었다. 기록에는 “그들이 사람을 죽여 양식으로 하였으며 부녀자들을 윤간한 다음 포(脯)를 떴다”고 되어 있다. 이들은 고려의 동북경 요충지인 등주, 화주 등을 점거함으로써 일단 고려 침략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합단적이 침략해 오자 고려의 충렬왕은 강화도로 피난을 갔고 만호(萬戶) 인후(印侯)를 북방에 보내 이들을 방어케 했다. 그러나 적에게 패하였다. 충렬왕 17년(1291) 정월 합단(哈丹)군은 철령(鐵嶺을 넘어 고려의 중부 내륙지역까지 진출하였다. 이들은 양근성(楊根城)(경기도 양평)을 함락하고 원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당시 원주에서는 별초(別抄) 향공진사(鄕貢進士) 원충갑이 적을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향공진사란 지방관의 주관하에 실시된 과거에 합격한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원충갑은 토착세력으로써 향토 방위를 위해 앞장섰던 것이다. 한편 고려 조정에서는 세자를 보내 원 황제를 만나 보고 합단을 토벌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원 세조는 설도간과 나만대에게 명령하여 군대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도록 하였다.

2월에 접어들어 원에 가 있던 세자가 장군 오인영을 시켜 원 세조에게 상황을 다시 보고 하며 대책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세조는 물었다. “그대의 나라는 당 태종이 친히 정벌하였으나 오히려 이기지 못한 나라이다. 또 우리 왕조가 창건된 초기에 귀순하지 않았으므로 우리 왕조에서 정벌했으나 역시 쉽사리 이기지 못하였는데 지금 이 조그마한 도적을 왜 그렇게도 무서워하는가?”라고 하였다. 오인영이 대답하였다. “옛날과 지금의 상황이 달라 나라의 융성과 쇠약도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세조는 야간을 틈타 기습을 하는 야습전(夜襲戰)을 하라고 일러 주었다. 이로써 볼 때 원은 고려를 고구려의 후예 국가로 생각했으며 고려 또한 만만치 않은 국가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합단적의 침입에 당황해 하는 고려의 모습에 안타까운 면이 없지 않았던 것 같다.

4월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방호별감(防護別監) 복규(卜奎)가 원주에서 합단적과 싸워 58명을 포로로 잡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어 충주에서는 충주산성별감(忠州山城別監)이 합단적을 격파하고 적의 머리 40급을 바쳤다.

그러자 이들은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충남 지역으로 넘어 들어왔다. 충렬왕 17년(1291) 5월의 일이었다. 연기 대첩의 서막이 오른 것이었다. 이 연기 대첩은 2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1차 전투는 연기현(燕岐縣)의 정좌산(正左山) 근처에서 이루어졌다. 이 때에는 이미 원나라 원군이 고려에 당도하여 있었다. 따라서 고려에서는 3군을 편성하여 이들과의 연합작전을 개시하였다. 3군은 인후(印侯)가 거느린 중익군(中翼軍), 한희유(韓希愈)가 거느린 좌익군(左翼軍), 그리고 김흔이 거느린 우익군(右翼軍)이었다. 이들은 합동 작전을 개시하여 합단적을 크게 무찔렀다.

그러나 뒤떨어져 오던 합단의 기병 3천이 합세하면서 이들은 군세를 다시 정비하였다. 1차 전투가 끝난 후 나만대의 원군은 늦게 도착하여 연기의 싸움에 참가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그들과 싸우려고 하였다. 고려군도 합세하였다. 그러나 전세는 만만치 않았다. 합단적 가운데 용사 한 사람이 있어 활을 당겨 쏘기만 하면 매번 우리 군사가 한 사람씩 넘어지곤 하였다. 그러자 좌익군을 거느렸던 장군 한희유가 1장 8척이나 되는 긴 창을 휘두르면서 말을 달려 적진에 돌입하였다. 적들이 놀라 한쪽으로 밀리므로 그 용사를 움켜잡고 나와서 목을 베어 죽이었다. 그의 머리를 긴 창에다 걸어 적에게 보였더니 적들의 기가 꺾이었다. 이때에 대군이 급히 나아가 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적들 가운데 노적(盧的 ·합단의 아들로 老的으로도 표기)의 부자 등 2천여의 기병이 포위를 뚫고 달아났다.

나만대는 추격하려 했으니 설도간이 만류하여 더 이상의 추격은 포기하였다. 인후, 한희유, 김흔이 사람을 보내 승전을 보고하고 포로한 부녀자 8명을 바쳤다. 합단의 잔적 1천 명은 동주(東州 : 철원)까지 왔다가 연기에서 대파당했다는 소문을 듣고 도로 철령을 넘어 도망쳐갔다. 이것이 2차전투였다. 이 전투는 원수산(元帥山) 근처에서 이루어졌다.

이 연기대첩에 대해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충렬왕 17년에 합단적이 침략해오자 왕이 원에 군사를 청하였다. 원 세조가 평장 설도간을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돕게 하였다. 왕이 한희유․김흔 등으로 3군을 거느리게 하여 원나라 병사와 같이 합단적과 현의 북쪽 청주와의 경계인 정좌산 밑에서 싸워 크게 승리하였다. 공주 웅진까지 추격하였는데 엎어진 시체가 30여 리에 걸쳐 있었고 죽이고 사로잡은 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지금에 이르러 군대가 주둔한 곳이라 하여 원수산이라 한다.” 이는 바로 연기 대첩의 1, 2차 전투를 잘 요약하고 있다.

합단군은 비록 원 나라 황실의 내분 때문에 침략한 적이지만 고구려의 막강한 후예국으로 인식했던 고려가 원의 일부를 무찌른 값진 전투라 하겠다. 지금도 연기군에서는 조치원읍 부근의 고북저수지에 연기대첩비를 세워 전투의 승리를 기념함과 동시에 전장에서 사라져간 고려 군인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대전대학교 인문예술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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